폭음하는 날이면 엄마는 항상 꿀물을 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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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EEA.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누가 남긴 감상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항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영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좋아하는 이들 모두가 그 영화를 극찬했다.
숙제도 있었고, 덕분에 오랜만에 진득하니 누워서 감상했었다. 영화 한 편을 끊지 않고 본 일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네들에게는 조금은 아쉬운 얘기겠지만 그만큼이나 좋은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그 비슷한 시기에 봤던 <더 웨일>이 훨씬. 그나마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돌덩이 두 개가 나란했던 적막 정도.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던 그 감상평이 훨씬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돌덩이들이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벌써 가물가물하거든. 다정함에 대한 정의는 제각기의 것이겠다. 누군가는 마음이 많다는 뜻이라고 했다. 내 경우에는 직독직해. 정이 많다. 다른 사람들의 정의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다정함을 바라는 일이 조금은 탐탁잖은 듯하더라. 다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헤아린다면, 무작정 그것을 바라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유를 듣고는 곧장 끄덕였다. 그러면서 되짚었다. 그럼 나는 그동안 얼마나의 것을 바랐던가. 얼마나 많은 부담을 상대에게 지워 왔던가. 최근에는 따뜻하기를 바랐다. 샅샅이 헤아려 주는 것은 바라지도 행하지도 않았다. 함께인 때에는 함께이고 싶었다. 동시에 함께인 때에 따로이고 싶었다. 이런 양가감정을 알고 있는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었다. 바라는 마음이 어딘가에 가 닿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필요한 그것들을 나는 준비할 수 있는가. 여전히 과정중인 질문이지만 중간에 내린 답이라도 괜찮다면 역시나 ‘나 먼저’일 것이다. 내가 먼저 따뜻해야겠고 내가 먼저 당신의 자리를 마련해두어야 할 것이다. 정돈되거나 근사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처럼 눈에 먼저 띄기는 십상이겠으나 곧 불편해진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자주 가지 않는 파인다이닝에서 식사를 하노라면 꼭 체하게 마련이더라고. 집에 도착해서 목 늘어난 티셔츠와 택이 다 바래서 글씨가 모조리 사라진 수면바지를 입고서 시원하게 트림을 한 뒤에야 속이 후련해진다. 그러니까, 편안함. 지금의 답은 편안함이 되고자 하는 욕구. 어지럽혀진 공간에서 나태하게 누워 있고 싶다. 그렇게 쉬다 보면 몸을 일으키고 싶은 때가 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어떤 질서를 마주하게 되진 않을까 망상한다. 정돈되지 않은 답이란 늘 이렇다. 찰리는 다정했을까. 그렇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렇지 못 했기 때문에의 부채감으로 엘리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 그동안의 것들을 게워내듯 성심성의로 갈음하려 한다. 찰리가 평생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에세이는 내가 느끼기에, 어떤 노래처럼 퍽 다정했었다. 그래서 나도 함께 울 수 있었나. 다정함의 이면에는 반드시 슬픔이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그 사람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웡카는 제법 다정했던 것 같다. 다른 장면들은 모두 차치하더라도, 플라밍고가 날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는 그 잠시의 찰나에서 누들에게 향하는 말이 나는 다정히 들렸다. 그리고 애비게일의 턱을 긁어주는 손은, 애비게일의 오므린 주둥이는 꽤 많이 슬펐다. 똑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눈을 지그시 감던 누군가가, 꽤 오래 전부터 유행처럼 번지는 ‘다정한 사람이 좋아요.’에 대해 그 사람이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얼마만큼이나 슬퍼야 그게 지겨워지나. 만인에게 다정히 대하던 엄마가 생각나서 내일은 기필코 신발장 벤치를 다 조립하리라 다짐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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