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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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 보자. 그러니까, 이제는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일임에도 허공을 노려보면서 하나하나 짚어 가야 한단 말이지. 망각이 이래도 축복일까? “금태!” 봄이 철이랬다. 가고 싶었던 식당의 예약은 이미 한가득이나 밀려 있었고, 시종일관 바쁜 네가 감히 시간을 낼 엄두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차선으로 선택한 곳이 부디! “주차장으로 먼저 가 있을까?” “응.” 내 바로 앞에서 닫히는 엘리베이터는 너의 사무실 층에 멈췄다. 나중에 일러 주기를, 이미 마주친 적이 있는 직원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 “오늘은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해 버렸다. 다시 지하1층을 향해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쪼그린 상태로 올려다 보는 일은 두근두근했다. 커다란 다른 차 뒤에 숨어 너를 놀래키는 것. 네가 놀라면 더 재밌었고 놀라지 않으면 덜 재밌었다. ‘더’와 ‘덜’이었지, 재미가 없던 적은 아직 없었다. ‘차 얻어 타도 돼?’라거나 ‘실례합니다.’를 머뭇거리는 일, 아니면 ‘태워다 줄게.’를 기다리는 일은 이제 없었다. 조수석이 당연한 자리가 되어 있던 걸까. 전엔 필름통이 놓여 있었는데 그 날은 필름카메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제야 기억났다. ‘이 사진 멋지지?’하고 내가 너에게 보여줬던 사진은 필름카메라로 촬영한 흑백사진이었다.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야외 노출이 되겠지만 5년이 다 된 지금에서도 그 사진이 종종 뇌리에 스치는 걸 보면 그 사진들이 나에게 단순한 야외 노출은 아니겠지. 그래서 네가 챙긴 카메라를 보고 ‘혹시 오늘?’하고 마음을 삼켰다. “여기 길 이름이 ‘벚꽃로’래.” “예쁘다. 비 안 와서 다행이야.” “그러게. 밥 먹고 산책 나오면 좋아.” 너랑 나랑은 둘 중 누구도 꽃을 보러 가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알고 있었다. 둘 다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 듯했다. 차로 달리는 벚꽃로는 근사했다. 처음이었다. “우리집 여기야.” 네 말에 곧장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게 어디였는지, 지금은 위치 말고 새삼 고마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 본인이 근무하는 곳, 사는 곳을 알려준다는 게. 내가 어려워 하는 일들을 곧잘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나 멋져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내가 누군가에게 얘기하지 않는 것들을 먼저 말해주는 이들에게 고마웠다. 당사자들은 별 거 아니라고 손사레 치던데, 과연. 어렵사리 도착한 곳에서의 금태는 사실, 내 기억 속의 그 맛과 너무 달라 나는 속으로 크게 실망했는데 너는 언제나처럼 조곤하게, “맛있다.”고 그랬다. 사실 나는 미안한 맛이었다. 네 품에서, 아니면 너를 마주보고 피우는 담배가 포근했다. 너는 싫었겠지만. 그래서 고마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람의 방향을 부단히 살피고 바람에 너를 등지게 하는 일뿐이었다. 어떤 대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더웠는데 덕분에 바람 쐬어서 좋다고 말하던 네 목소리는 기억난다. 그리고 그것도 기억난다. “빨간 조명이 있으면 사진이 잘 나와.” 너는 내리막길을 걷다 말고 나를 앞장세웠다. “거기 서 있어 봐.” 나는, “누가 찍는 거 의식하면 바보 같이 나와. 몰래 찍어 줘.” “그 맛에 찍는 거야.” 얼어버렸다. 얼굴도 손끝도 어깨도 모두 경직됐었다. 노출된 곳이라곤 손과 목덜미, 얼굴 그리고 발등 정도. ‘야외 노출’과는 거리가 먼 사진 한 장. 피사체가 되는 일은 퍽 오랜만이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내 예상보다 화각이 좁았던 것, 너무 성급하게 셔터를 눌렀다는 것, 그래서 네 사진이 잘 나올지 걱정했던 것. 나중에는 담벼락 너머의 목련, 검정색 하늘이 꼭 매트한 흑켄트지 같았다. 목련을 촬영하는 네 뒷모습을 이튿날 메신저로 보내면서는 사실 좀 조마조마했다. ‘고마워. 그런데 앞으로는…’으로 운을 뗄까 봐. 너는, ‘잘 찍었네’ 했었다. 두 번째로 방문했던 위스키바, 처음 방문했을 때에도 그랬다. 화장실로 향하는 내 등 뒤에 대고 바텐더는 “여자친구분이 술을 잘 아시나 봐요.”했었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통에 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 한다. 나는 이런 상황들을 두고, “어딜 가든 그래, 우리 사귀는 줄 안다.”고 그랬다. 툴툴거리는 걸로 보였을까. 그러면 너는 그냥, “그러게.” 하고 내 손을 더 꽉 쥐었던 것 같기도, 착각이었을지도. 여하지간 종전의 방문과는 사뭇 달라진 네 외견 탓이었을까, 바텐더는 나랑만 눈인사를 나눴다. 그래서 바텐더가 등을 돌리고 다른 칵테일에 열중해 있을 때에 너한테 속닥거렸다. “나만 알아보시는 거 같은데.” “이따 나가면서 안경 벗어야겠다.” 너는 비장한 표정을 했고 나는 와하하 크게 웃었다. 또 내가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둘은 비밀스럽게 담소를 나누었던 모양이었다. 바에서 나서면서,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며 깍지를 끼우다가, “나도 기억하고 계시더라. 전에도 여자친구분이랑 같이 오셨지 않냐고 하던데.” “헐.” 아주 조금 허무하고 민망했다. 네 엉덩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비밀 하나를 알게 됐다. “나는 뒷주머니에 항상 콘돔 넣고 다녀.” “헐!” 사실 놀랄 건 아니었는데 네 표정이 그랬다. “뭔가 엄청난 비밀을 알려주는 표정이야.” 너는 크게 웃었다. “너가 목걸이 했던 날,” “응.” “그 날은 꼭 엄청난 비밀을 들킨 표정이었어.” “그래?” “응, 엄마 몰래 산 게임기 깜빡하고 못 숨겼다가 들킨 표정.” 너는 더 크게 웃었다. “그래서, 그 날은 말 안 했었는데 그냥 속으로 ‘아, 혹시 여자친구랑 같이 한 건가’했었어.” “그건 아니고, 산지 얼마 안 됐어.” 너는 웃으면서 내 이마에 소리나게 입을 맞췄다. 텅 빈 도로에 너랑 내 웃음이 퍼졌다. Lovechair.co.kr 것보다 우리는 안마의자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발을 엄청 세게 쥔다는 내 말에 너는 “발이 많이 피로했나 보다.”고 맞받아쳤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섹스였다. 물론 그 중간에 끼어든 러브체어는 다소 신선한 양념이 됐는데, 사실 너나 나나 슴슴하게 먹는 걸 더 선호하니까. 물론 존나 짜고 매운 것도 마다 않지. 나랑 너를 사이좋게 담아둔 필름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현상은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 한다. “현상도 직접 해?” “아니, 현상은 맡겨.” “그렇구나.” 어쩌면 현상소에 까마득히 바래 갈지도 모르겠다. 나는 목련[몽년]을 적을 때에, 소리 나는 대로 적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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