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deep, dee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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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를 구워 먹어? 궁금해.”
“진짜 맛있어. 내일도 먹을 거야.” “궁금하다.” 너는 그랬다. “나도 해 줘.”나 “같이 먹자.”보다도 “궁금해.”가 너의 주였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아무 의도 없는 말습관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너에게 배추를 구워 주지 않았으므로 본의와는 다르게 약올린 셈이 되는데 그 상태로 몇 달을 지속했더랬다. 또 너를 약올린 적이 많았다. 전복내장으로 만든 크림파스타도 그랬고 쪽파와 가쓰오부시를 올린 볶음면도. 직접 만든 토마토소스도 너는 항상 궁금하다고 했다. 이외에도 안키모 넣은 주먹밥이나 키트로 만든 초밥 같은 것들. 군고구마는 다행히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고맙게도 좋아했다. 그리고 너는 운동도 좋아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나랑 운동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았고, 같이 운동을 한 날도 썩 좋아했던 것 같다. “운동하는 여자 처음 만나 봐.” 언젠가의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괜찮은 유산소 뭐가 있을까’ 네 혼잣말에 나는 답했다. ‘달리기!’ ‘~해야지!’ 시리즈. 운동과 식단, 공부, 독서, 밀린 포스팅 이외에 또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청소겠다. 가까운 누군가는 사진만 보고서 피난을 가느냐며, 사실은 사람이 아닌 돼지였고 집 아닌 우리에서 지내는 거였느냐며 놀란 마음을 장난스레 전했다. 주문한지 두 달을 훌쩍 넘긴 식탁이 마침내 도착했기 때문에, 그리고 친구들을 초대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청소를 미룰 수는 없었다. 1. 황변한 이끼들과 너무 빽빽해진 아스파라거스에 가위질을 하고 나서 2. 셀프세탁소에 이불을 넣고 3. 생활용품점에서 양 손 가득 뭔가를 사다가 4. 집에서 화장실 거울을 닦고 나면 알람이 울렸다. 5. 다시 세탁소에 들러 건조기를 돌리고 집으로 돌아와 6. 불려둔 주방을 문질러 닦고 7. 한 달은 밀린 설거지를 하고서 8. 음식물쓰레기와 분리수거할 것들을 잔뜩 이고 지고 나간 다음에 세탁소에 마지막으로 들러 9. 따뜻하고 뽀송해진 이불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 가까웠던 친구는 청소나 설거지를 할 때에 깨끗하게 비워지는 머릿속이 좋다고 그랬다. 그런데 나는 안 그랬다. 비워지기는 커녕, 거울에 두껍게 굳어 버린 물때를 노려보면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고, 이불이 거품을 물고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연장되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조금은 괴로웠다. 새삼 그 친구가 부러웠다. “집 다 치웠다! 식탁도 왔어!” “오, 궁금해.” “놀러 와. 배추 구워 줄게. 파스타도 해 줄게!” 마음이 홀가분했다. “에어프라이어 있어?” “응, 군고구매 전용.” “고구마 맛있어. 근데 당이 너무 높아.” “GI지수는 안 높아.” 퇴근이 늦어지면 조바심이 난다. 약속을 앞둔 퇴근은 더욱이 그렇다. 그래서 평일 약속을 잡는 것이 조금은 걱정스럽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기다리는 거면 나았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항상 조바심이 났다. 18시가 다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집중하고 있는 거겠거니- 평소에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 퇴근 몇 시쯤에 해?’ ‘한 7시? 퇴근했어?’ ‘아직 나는 도착하면 20시쯤 될 것 같아 우리 동네 오는 거 한 20분쯤 걸리지?’ ‘응 차 안 막히면 그럼 그 시간에 맞춰서 갈게’ ‘천천히 조심히 안전히 와’ 다행히 너보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허둥지둥 출근하느라고 아침에 분리수거하지 못 했던 쓰레기들을 너는 영영 볼 수 없을 테지. “응, 너 평소에 내려 주던 거기로 가면 돼?” “음 그 안쪽으로 들어와. 주차장 있어. 메시지로 보내준 위치로 오면 돼.” “아, 그 말을 안 했다. 근처에 트레이더스가 있더라구. 거기 고기가 좋대.” “나 고기 구울 줄 몰라.” “내가 구우려고.” “그래. 그럼 나는 배추 구워 줄게.” “전복내장크림파스타도.” “응.” 생각보다 트레이더스는 멀었다. 초행길이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짧았으니까. 주차장에서 네가 천천히 후진하고 있을 때에,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차에게도 너는 클랙슨을 울리지 않았다. “돌았나?” 누누이 얘기했고, 너는 누누이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내 성격은 가차없이 더러웠다. 네가 아니라 고등학교 친구였다면 “저 씨발새끼가 뒤질라고.”라고 했을 걸. 더 심한 욕도 나는 불사했다. “운전하면서 클랙슨 울려 본 적 있어?” “음-” 너는 오래 고민했다. “가끔? 잠든 거 같은 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빠도 그랬다. 마지막으로 아빠 차에서 들은 경적소리가 2002 월드컵, 대-한민국 구호에 맞춰 뽕뽕거렸던 것. 운전대에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어린 시절에, 아빠에게 허락을 구했다. 아빠는 알겠다며, 공터에 가서 조심스럽게 눌러야 한다고 했다. 그 일화를 너한테 전하면서 그 어렸던 시절처럼 키득거렸다. 너는 “그래도 다 하도록 해 주시나 보네.”하고 중얼거렸다. “카트 가져올 걸 그랬나?” “나 그거 5분도 안 돼서 다 채울 수 있어.” 벽에 커다랗게 붙은 행사 포스터 여러 장 중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단연 치즈버거였다. 육즙이 생생한 이미지를 보고, “아, 배고파.”했다. 너는 “맛있겠다. 야해.”하고 맞받아쳤다. 많고 많은 포스터 중 네 눈에도 치즈버거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창고형 대형마트에서 고기를 킬로그램 단위로 판매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너는 그냥 집 앞 슈퍼로 향했을까. 음, 모르긴 몰라도 너는 두 명이서 2kg의 등심을 다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너는 장을 보러 온 중년 남성과 나란히 서서 더 질 좋은 고기를 향한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그 날따라 유독 등이 커 보였다. “아침에 등 하고 왔어?” “응.” “짱 커.” “너무 늦게 왔나, 좋은 고기가 안 보여.” “나 그런 거 잘 몰라. 근데 너무 많아. 1근까지는 먹을 수 있는데 배추랑 파스타도 먹어야 돼, 우리.” “음.” 넓게 둘러보던 너는, “한우 살까? 800g이면 둘이서 딱 좋을 거 같은데.” 양은 절반도 안 됐는데 가격이 3배를 웃돌았다. “800g도 많아. 다음에.” 말뿐이라고 하더라도 고마운 마음이었다. 나는 남은 고기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가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거 사무실에 두고 먹을까?” “이거 맛있겠다.” “이거 맛있어.” 허기진 상태에서 장보는 것을 지양하라고 했던가, 우리집 냉장고가 이미 다 차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아마도 트렁크 가득 주전부리를 실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집 냉장고 지금도 뚱뚱해.” “한 5-6명이서 어디 갈 때 오면 딱이겠다.” “캠핑! 재밌겠다.” 술 구경, 과일 구경, 가전제품 구경. 네가 얘기했던 신기한 세탁기는 아직 입고 전이었을까. 네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젓가락 행진곡 연주를 마치고 한 걸음 물러났을 때, 너는 어떤 코드를 잡았다. 유독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보였다. 뭇 여성들이 악기 다루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악기에 본인을 대입해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저렇게 섬세하게 나를 다뤄 준다면 나는 이처럼 고운 선율로 노래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무인 계산기가 카드를 집어삼켰을 때에도 너는 주차장에서와 같이 태평했다. 오래 기다린 후 기계가 마침내 카드를 뱉어냈을 때, 너는 직원을 향해 고맙다고 인사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21시가 다 되어 있었다. 작년 7월 16일 이후 누군가를 집에 데려오는 것이 처음이었다. 조금 긴장했다. 그러나 많이 배고팠다. “파스타 얼마나 걸려?” “한 20분?” 작은 주방에서 파스타 소스를 만들고 면을 삶고 배추와 고기를 굽는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어프라이어에서 저온으로 고기가 숙성되는 동안에 나는 전복 내장과 마늘과 양파를 볶을 수 있었고, 숙성된 고기가 팬 위에서 시끄럽게 익어가는 동안에 버터와 후추를 네 손이 닿는 곳으로 가져다 둘 수 있었다. 팬을 굴리고 있을 때 내 어깨 너머로 네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면 나는 등 뒤로 몸을 기대고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바다 냄새 나.” “응, 그런 맛이야.”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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