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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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삐 살려고 아등바등거리는 이유 중 하나는 멈춰 섰을 때 자꾸만 떠오르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었어. 외로움을 언제 느끼냐고 물었을 때에 너는 바쁘게 지내다 보면 그런 거 느낄 겨를이 없다고 그랬었잖아. 그 날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래서 같이 살았던 누군가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쩔 줄 몰랐을까, 너는. 나도 어찌 할 줄을 몰랐었다. 근데 거창한 위로는 곧 너한테든 나한테든 부담이라서 그냥 위로 대신에 인지 정도면 좋겠다고 너한테 말하진 않았지만 바랐다, 바보 같이. 내 외로움을 너한테 전가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냥 내가 외로움을 종종 느끼는구나, 하고 알아 줬으면 했어. 도움은 이미 사람이 아닌 것에 받고 있으니까.
또 바보 같았던 건 내가 오매불망이 되어 버린 거. 이미 나를 거쳐 갔던 몇 명의 오매불망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업무 시간 동안에 손목시계가 연달아서 진동하면 나는 너를 먼저 떠올렸다. 그 오매불망들도 내 메시지를 이렇게 기다렸을까. 그리고 서운했다. 점심 먹기 전부터 퇴근하고서 한참 나중에까지 1이 사라져 있지 않으면 대외적으로는 ‘바쁜가 보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직후에는 꼭 ‘대체 얼마나 바쁘면…’이 뒤따랐다.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칭얼거렸던 세 번 중 마지막 날에도 그랬다. 수 시간을 쉼 없이 업무에 열중하고 있을 너의 피로보다도 내 서운함이 난 더 앞섰었다. 연인이냐 묻는 사람들에게 그렇다고 답해 줘서, 너가 좋아하는 식당과 술집에 데려가 줘서, 내가 해 준 음식들을 남김 없이 먹어 줘서, 고기를 구워 줘서, 서툴게 설거지해 줘서, 사레 들렸을 때 등 두드려 줘서, 예쁘게 사진 찍어 줘서, 프레임 안에 너랑 나를 함께 둬 줘서, 매운 닭꼬치 먹었던 날 헐레벌떡 우유 사러 뛰어갔다 와 줘서, 마지막 하나 남은 넴을 네 숟가락 위에 얹었을 때에 비행기로 내 입 안에 넣어 줘서, 내 손 너 외투 주머니에 넣고 걸어 줘서, 잠결에 뒤척일 때마다 어김없이 안아 줘서, 물기 남은 몸을 닦아 주고 나서 바디로션 발라 줘서 고마웠어.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정녕 어른의 연애인가 싶다가도 끝끝내 사귀자고 말하지 않는 너한테 나는 항상 의문형이었을까. 나는 나 스스로가 의문형이었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어. 너한테 상처 주지 않을 확신이 아직은 없었다. 상처를 받고 싶지도 않기도 했고. 잃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얻고 싶지 않음을 너는 이해해 줄까. 지금의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가 스스로한테 물을 때마다 한참이나 고민한 후에야 내린 답은 매번 ‘아니’였다. 소유하고 싶은 건 다른 거니까. 그래서 이 욕심이 버려질 때까지 번민해야겠다 했었어. 다 비워지고 나면 그 때에는 헤어질, 혹은 사랑할 결심이 서지 않을까 하고. 만나다 보면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했어. 지금은 불분명할지라도 점점 윤곽이 선명하게 또렷해지지 않을까. 그것도 내 욕심이었겠다. 분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욕심이 나를 외롭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너랑 같이 있는 때에는 내내 잊게 됐다가 손 흔들고 난 직후부터는 꼭 불안했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려나. 그랬어. 또 만나잔 말이 없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관계가 사실은 너무 싫었다.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 관계. 이미 말했던 것과 말하지 않았던 것은 너 이전에 만났던 사람이 무지 많았다는 거, 그리고 여전히 그 사람들에게 종종 연락을 받는다는 거랑 너 몰래 그 사람들을 거절해 왔다는 거. 가장 최근에는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해 버렸다. 비겁하지? 내 독단은 항상 이기적이다. 가장 비겁한 건 다름 아닌 너에 대한 내 태도였다. 오래 전에 한 번, 네가 사귀자고 말하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 김칫국에 거하게 취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나 지금에나 바뀌지 않은 내 답은 ‘아니’였다, 이번에도. 너한테 종종 얘기한 적 있는 그 친구를 나는 아직도. 이토록이나 너한테 무례히 굴면서도, 관계를 확고히 해야겠단 그 명분 중 하나가 ‘만일 나한테 남자친구가 생기면 너를 홀연하게 떠나가야 할 텐데, 그런 구멍을 너한테 남기고 싶지 않은 욕심’때문이라니. 너는 다 알면서 처연했던 걸까.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일까. 너의 깊이를 나는 무슨 자격으로 얕잡아 본 걸까. 그동안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마음으로 대해 와서 미안해. 그 어떤 결심도 없이 욕심 속에 가둔 것도. 아직 남자친구가 생긴 건 아니지만 홀연하게 너를 떠나면 넌 곧장 노트북을 챙겨서 카페로 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찾게 될까. 염치 없지만 둘 다 아니면 좋겠다. 이 마저도 욕심이지만 너가 외로움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람한테 도움을 구하기도 했으면. 대신에 나도 이제는 사람한테 조금은 덜 기대 볼까 해. 무거웠던 거 알면서도 떠나는 게 무섭다는 이유로 그냥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너는 이제 홀가분하게 가벼워지려나. 그동안에 많이많이 고마웠어. 나는 이만 떠나.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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