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of Matsu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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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친구네 집에서 봤던 영화. 당시에는 졸면서 봤다. 어린 마츠코가 결코 웃지 않는 아빠와 놀이동산에서 어떤 쇼를 보던 장면에서 잠들었던 것 같다. 친구는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울었다고 했다. 걔는 중학생 때부터 6년 동안 나를 미워하고 또 좋아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너 빼고 다른 애들 선물 다 사 왔었어. 근데 너도 솔직히 인정하지? 그 때 너 존나 재수없었잖아. 너가 나였어도 그랬을 걸?” 그걸로 걔랑은 어떤 접점도 만들지 않고 있다. 여기까지는 그냥 사족. 극 중 쇼에게 목사가 말하기를, 깊이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에 한 번, 영화 제목을 보자마자 또 한 번, 걔가 생각났거든. 나이와 몸무게의 앞자리가 달라진 지금 다시 본 마츠코의 일생은 나 역시도 울게 했다. 또 모르지. 울고 싶었는데 마침 눈에 띈 게 마츠코의 일생이었을지도. 내 눈물의 의미가 연민이라면 아마 높은 확률로 자기연민이었을 것이다. 걔는 왜 울었으려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우리는 세뇌 당하면서 자라는데, 정작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이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 같다. 이런 모순된 삶 속에서 나를 그리고 너를 지탱하게 하는 것도 사랑이어야만 하겠지.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자면,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을 해야만 할 것이다. 피칠갑이 되어 버린 쇼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마츠코가 꺼내든 말은 고작 “임신하고 싶어.”였다. 생뚱맞아 보일지 모르겠다만 임신에 대한 페티시를 가지고 있다면 조금은 마츠코의 말을 이해할지도. 물론 아닐 수도. 웃기지만 나는 임신 페티시가 없다. 굳이 꼽자면 사랑 페티시이려나 ㅋㅋ 아니면 눈? 더 웃기네. 엉겁결의 거짓말을 포착해내는 능력을 또 다른 말로 헤아림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만, 모두에게 헤아림에 대한 여유가 조금씩만 더 있었더라면 마츠코는 훗날, 혐오스런 마츠코가 아니라 사랑스런 마츠코가 되어 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교도소 안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마츠코의 얼굴이 가장 예뻤다. 채워지기 위한 몸부림 같지만 어쩌면 비워내기 위한 맘부림은 아니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채워내는 것과 비워지는 것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지 않으려나. 끝과 끝은 항상 맞닿아 있으니까. 여러 의미로 내 사랑은 글러먹었군 ㅋㅋ 그래서 울었는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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