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 익명게시판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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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없다. D를 하나의 어절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재수없다’ 외에 생각해낼 재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D와 나는 서로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관계였지. D는 나의 시간과 몸과 돈을 이용했고 나는 D의 자지와 목소리를. 뭐, 내가 그만큼이나 빼어난 외모를 가진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시간이 차고 넘치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나의 것들을 할애해서 D의 자지를 야금야금 까먹었다.

십수 년 전의 나는 또래 친구들이 크기를 외치고 다닐 때에 홀로 강직도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로했다. 근데 이제는 강직도도 뭐 그리 대단한 요소인가 싶다. 그렇다면 지금은 도대체 무어가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논외로 두고, 그런데 D의 앞에서는 다시금 강직도를 꺼내들어야 할 것만 같았다. 강직하다 못해 선명한 자지는 (반백년은 아직 못 됐지만)살다살다 처음이었다.


남자와 단 둘이 마시는 술자리를
내 헤픈 울음과 상대방의 헤픈 위로를
나는 부단히 후회할 수밖에는 없었고
나누어야만이 달래지는 슬픔들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별과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듯 쉽사리 맺어지는 만남이
꼭 나만 가지고 있는 마치
향기 가득 배어있는 단물과
꼭 보기 좋게 물 들은 혀 끝인 양
타인과 나를 구별해 주는 특별함인 줄로 착각했다.


D는 나를 위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그 자리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뿐이었다. 나만큼이나 D는 고도주를 즐겼고, 또 D만큼이나 나는 취한 티가 거의 나지 않는 인간이었다.
술과 밤이 있는 한 남녀 간에 친구는 없다던 그 말을 나는 앞으로도 미워할까.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 나는 D에게 거의 대롱 매달리다시피였고 울음 대신 헤실헤실 웃음을 길바닥에 흩뿌리는 중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아니면 우스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문득의 파편 중 하나는 장화 벗는 게 다소 힘들었던 것. 다행스럽게도 비는 그쳤지만 통기가 전혀 되지 않는 고무부츠와 짭쪼름해진 피부가 서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거든.
또 난 뭘 했었나- 오줌이 마렵다며 5분 간격으로 화장실을 들락거렸을까, 아니면 벽을 시원해서 좋아한다며 D를 등지고 벽에 손바닥을 마주대고 술냄새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으려나.
아무튼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 D는 꽤 거만하게 컴퓨터 책상 앞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팔걸이 끝에 손을 축 늘어뜨리고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으레 습관이 무섭댔던가. 나는 곧장 네 발로 기어가서 D의 바지 버클을 잘그락거렸다. 올려다 본 D의 얼굴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아니면 제 바지를 벗기는 일을 돕지는 않았다.

D는 내가 본 가장 완벽에 가까운 바닐라였다. 아니면 바닐라에 가까운 완벽이던가. BDSM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가학과 피학, 명령과 복종 그 너머를 사람들은 대체로 ‘호기심’으로 표현하던데.
하드코어만 SM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회유와 굴종도 물론 포함이겠고. 관계가 수평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치면 BDSM을 배제하고 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소프트한 성향도 성향이고, 무성향도 어쩌면 성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도 아무튼 D는 바닐라였다. 획일의 섹스가 지루할 법도 하다만, 전술했듯 몸과 돈과 시간을 사용해 가면서 D가 나를 이용하도록 허용한 것은 정말로 그의 자지가 전례 없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입에 넣었을 때에도, 손으로 쥐었을 때에도 별다를 것 없었다. D의 자지가 나를 가르고 들어온 순간에, 술로 인해 흩어졌던 정신들이 한 데 모이는 것 같았다.
“너 뭐야?” 하고 내가 당혹스러움을 여과 없이 내비쳤을 때 D는 “뭐가?” 하고 되물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계의 모양 역시 변한다. D와의 접점은 꽤 신선했는데 그 신선함이 무색하리만치 우리는 서로를 무디게 대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까, 둔탁하게 반응했다.
술, 정확히 D와의 첫 섹스가 있던 밤의 전까지 지속됐던 안부는 더 이상 없은지가 오래였고 간혹의 (섹스를 위한)만남이 있더라도 서로의 눈에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하는 궁리만 가득했다. 어떤 관계는 몇 년을 주기로 만나도 꼭 며칠 전에 만난 듯 자유스럽지만 또 어떤 관계는 어제 만나서 살을 부비고 심지어는 몸의 결합을 이루어냈더라도 자유를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아마도 어떤 이들이 말하는 ‘현타’가 이에 속하는 것이라면, 나와 D는 각자의, 또는 서로의 현타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영영 공유하지 않는 관계인 셈이었다. 우리에게는 공명이 부재했다.


다행인 점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데, 첫 번째로 D의 앞에 울지 않았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D가 나에게 쉬운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는 점. 두 번째로 내가 당면했던 슬픔이 D에게는 제법 시큰둥한 일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의 만남이 쉽게 체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D의 공백ㅡ이별 대신 공백이라고 적는 이유는 아마도 나는 D에게서 오래간만의 연락이 온다면 여느 때와 같이 반가울 테니까ㅡ을 인정하기 어렵지 않았다는 것.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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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07-16 14:45:04
A는 어딨죠?
익명 / 흠 지금도 아마 일하고 있을 텐데 ㅋㅋ 이걸 물으신 건 아닐 테니 조크로 받아 주세요 ㅋㅋ 순서는 없고 D가 처음이에요
익명 2024-07-16 10:53:26
글, 즐겁게 읽었습니다. 눈이 뇌를 호강 시켜줬네요. 감사합니다.
익명 / 감사는요 ㅎㅎ 즐겁게 읽어 주셨다니 제가 드릴 말씀인 걸요
익명 2024-07-16 00:10:15
잘읽었습니다. 궁금증이 생겼어요.
실례가 아니라면

1. 몇살이신지?
2. 강직도 말고 지금은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익명 / 정신연령 12살이요 ㅋㅋ 요즘은 태도가 기억에 좀 오래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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