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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는 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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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영화나 책을 자주 읽거나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의 것들 뒤에 항상 잔존하는 여운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작중의 인물들은 미안하다는 표현을 꼭 말로 하지는 않는다. 내가 봐 온 대부분은 몸짓으로 표정으로 행동으로 표현하더라. 그 표현이 작품의 전부인 것도 있었다. 미안함을 유발하기 위한 서사와 미안함을 건네기 위한 사투와 미안함에 응답하기 위한 어떤.

1.
얼마 전에 만원 지하철을 탄 일이 있었고 운 좋게 나는 앉아서 갔는데 몇 정거장을 안 지나서 꾸벅 졸았다. 내 무릎깨를 주먹 따위로 세게 내려치는 감각에 눈을 잠시 떴다. 머리 위 선반에 놓인 묶이지 않은 비닐봉지에서 떨어진 아오리사과였다, 주먹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같은 날, 같이 식사를 하던 사람들에게 전했더니
“사과는 받았어요?” 하더라.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내 앞에 서 계신 분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선명히 지나갔다.
“어쩔 줄 몰라 하시더라구요.” 눈이라도 마주쳤더라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고개 한 번 끄덕이거나 작게 웃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 사람에게 나랑 눈을 맞출 여유 같은 건 없었겠지. 역력한 당황의 손으로 내 발 옆에 떨어진 과일을 냉큼 줍는 모습이 나는 사과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1
또 어떤 날은 좀체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의 비난을 목도한 일이 있었다. 그 비난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짐짓 그 상황을 안도하며 관람할 수 있었던 걸지도. 나를 향한 비난이 아니었으니까.
이유는 다름아닌 사과였다. 사과가 없다는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대상이 되는 사람은 주체자에게 작은 잘못을 했던가. 잘못의 크기와는 다르게, 사람의 태도는 상황을 고무시키기도 소화시키기도 하더라고.
“내 부탁이 어려우면 거절했어도 돼. 그거랑 별개로 나는 지금 무례가 불쾌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게 불쾌할 일이 뭐가 있어?”
“미안하다고 하면 끝날 일이야.”
“뭘 사과해야 해?”
.
.
.

0.
미안하다는 말이 반드시 필요한가. 사랑은, 그럼 고마움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은 있었고, 반대로 말껍데기만 남은 텅 빈 것 역시 존재(부재)했다. 부재의 부재가 존재인지 부재인지, 도대체 무엇으로 분류해야 좋을지 골몰할 무렵에 나는 말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했던 것 같다.

3.
어떤 남자가 나를 더러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상했다. 그와 나의 사이에는 사랑이 일 만한 일말의 사건이 없었고 그가 건네는 말을 받아들이기에 그 말에는 나를 향한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는 곧장 당황했다. 뭐라고 얼버무렸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사랑이 가소로웠을까. 아니면 그 텅 빈 말이 가소로웠을까. 머지 않아 나는 그에게 실체 없음을 이유로 떠나겠노라 고했다.

4.
오랜 친구였던 이에게 나는 여전히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지낸다. 그러니까, 지금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이.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서로의 고통에 함께 울었고 기쁨에 함께 웃었다. 도움이 될 만한 조언도,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개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금은 부지불식간에 생겨버리고 마는 듯하다. 그 틈 안을 비집고 들어간 불순물과 습기가 엉겨 얼고 녹는 일을 반복하면서 금은 점점 깊어 가고 관계는 침식된다. 두동강인지 박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나긴 났고, 관계의 모양이 예전과 같지 않음은 확실히 알겠다. 한결 같음을 유지하기는 어렵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주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서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비난했다. 그렇게 완성된 상처의 크기를 서로 맞대어 보면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영락없는 유치뽕짝이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면 나는 진작에 내 성급함과 미숙함을 사과했을 텐데, 이제 문제는 관계였다.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미안함을 건네는 것은 일방적인 일이고 그것은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나로 인해 받은 상처가 곪아 괴로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당에 내 마음 편하고자 사과를 건넬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따위의 방식으로 자위하는 것과 그리고 오랜 옛 친구가 이와 같은 일을 다시는 겪지 않는 것을 바라는 일 정도.

2.2
기실 비난의 주체는 나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나에게 염색체 절반을 물려준 나의 엄마였다. 비난의 방향은 정확히 엄마를 관통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나를 향해 있었다. 나를 향하지 않았다고 안도할 일이 아니었다.
사과하는 일이 끔찍이도 싫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미안해야 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랑 똑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지독하게도 안 해.”
“그러게, 왜 이런 모습을 닮았니.”

5.
사실 나는 습관처럼 사과했다. 나와 섹스를 나눈 사람들의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섹스를 할 때에만, 그러니까 벌름거리는 보지 바로 앞에 불끈거리는 자지가 혀를 낼름거리고 있어야지만이 나는 잘못했다고 비로소 빌었다.
“잘못했어요, 주인님, 제발 자지 박아 주세요, 걸레보지에 주인님 자지 박아주세요…”
내 자존심은 그렇게나 알량한 것이었다.

2.3
그 날 이불 속에서 엄마를 끌어안으며 나는 부끄러운 미안함을 건넸다.

6.
끝끝내 전달될 수 없는 미안함을 주문처럼 왼 적이 있다.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미 져 버린 생명을 떡처럼 주무르면서 나는 작년, 매미가 처음 울던 날의 아침에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0.
글을 적는 지금도 나는 말의 필요성을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은 전술했듯 텅 비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고 또 어떤 것은 말하느니만 못 하기도 하지 않던가. 어느 누군가는 천 냥 빚을 갚는 수단으로써 이용하기도 하는 말에 대해, 내가 언젠가 그 필요를 느끼는 날이 올까. 말을 갈구하게 될까.
발화하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마는 말을.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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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08-05 01:20:19
글이 너무 좋네요.
사과하지 않지만 걸레처럼 사과하는 모순이 인간적입니다.
다 그렇게 살겠죠. 즐거운 한 주 보내세요.
익명 / 고맙습니다~
익명 2024-08-03 19:40:10
채 어둠이 걷히기 전,
살포시 뜬눈에 한껏 힘을 주어서 사물들을 하나씩 관찰했다.
보이는 것은 단순하고 일률적이였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여전했다.

이 어둠이 제법 길어지길 바랬던 이유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돌아서서 가만히 눈을 감고 벽앞에 앉았다.
돌고 돌아 결국 돌아가는 길은 같은 길이 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눈을 떠졌고 하늘은 열려 있었다.
채 어둠이 걷히기 전 나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상상했을까.

어느새
어둠은 걷혀 있었고 아침이 밝아왔다.
익명 / 같은 밤은 오지 않으니까 ㅋㅋ 길 말고 또 어떤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익명 / 생각은 늘 순간적인 감정에 동요되고, 그 생각들은 그대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죠.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일 겁니다. 같은 밤이라도 같지 않은 생각들로 길 말고 또 다른 어떤 공상들로 이 밤을 보내고 있는 것 같네요. 날이 진짜 덥네요. 더위 조심하세요^^*
익명 / 고맙습니다 ㅋㅋ 밤바람 벌써 시원하던데 여름이 저는 좀 짧았네요
익명 2024-08-03 19:13:40
말은 결국 전달되어야 하는 것
미안함을 말하고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지나가는 이에겐 너그럽고 가까운 이에게 엄격한 것은 어찌보면 소중함의 다른 표징일텐데 뜻같지 않은 어깃장도 언젠가는 정맞을 날이 있겠지
현재는 과거로 가고 과거는 미래로 가니 크게 자책할 필요도 없고
사랑에 사건이 필요해야 하면 그건 사고 아닌가
익명 / 전달되어야 한다는 마음 조차도 받는 입장에서 거부감이 든다는 걸 알면서도 건네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폭력ㅡ남용 같아 조심스럽지만 대체할 만한 표현을 못 찾은 상태인 것은 죄송ㅡ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욕심? ㅋㅋ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를 그 사람도 나도 결국에는 못 찾았고 앵무새처럼 의미없이 뱉은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메아리 정도였는데 공허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ㅋㅋ 납득을 차치하더라도 이유쯤은 필요해요 ‘아무나 사랑하고 싶었어’라도 ㅋㅋ
익명 / 개인의 감정과 기분이니 마음껏이겠지만 하고픈 말은 좀 다른 말이었음요
익명 / 뭐였을까요?
익명 / 못마땅한 얘기들
익명 / 어떤 게 못마땅해요? 나인가 ㅋㅋ
익명 2024-08-03 17:17:40
좋은 글이네요 누가 쓴 글인지 필력에서도 느껴져요 멋있어요
익명 / 그래요? 고맙습니다
익명 2024-08-03 17:04:54
고마우면 고맙다 미안하면 미안하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표현하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들을 한다고 돈드는거 아니고 세상 무너지는거 아니잖아요? 말은 정말 중요해요. 표현하며 삽시당
익명 / 아 ㅋㅋ 동감해요 저도 표현하는 거, 받는 거 좋아하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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