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그 어떤
21
|
|||||||||
|
|||||||||
0.
영화나 책을 자주 읽거나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의 것들 뒤에 항상 잔존하는 여운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작중의 인물들은 미안하다는 표현을 꼭 말로 하지는 않는다. 내가 봐 온 대부분은 몸짓으로 표정으로 행동으로 표현하더라. 그 표현이 작품의 전부인 것도 있었다. 미안함을 유발하기 위한 서사와 미안함을 건네기 위한 사투와 미안함에 응답하기 위한 어떤. 1. 얼마 전에 만원 지하철을 탄 일이 있었고 운 좋게 나는 앉아서 갔는데 몇 정거장을 안 지나서 꾸벅 졸았다. 내 무릎깨를 주먹 따위로 세게 내려치는 감각에 눈을 잠시 떴다. 머리 위 선반에 놓인 묶이지 않은 비닐봉지에서 떨어진 아오리사과였다, 주먹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같은 날, 같이 식사를 하던 사람들에게 전했더니 “사과는 받았어요?” 하더라. 그 말을 들음과 동시에 내 앞에 서 계신 분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선명히 지나갔다. “어쩔 줄 몰라 하시더라구요.” 눈이라도 마주쳤더라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고개 한 번 끄덕이거나 작게 웃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 사람에게 나랑 눈을 맞출 여유 같은 건 없었겠지. 역력한 당황의 손으로 내 발 옆에 떨어진 과일을 냉큼 줍는 모습이 나는 사과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1 또 어떤 날은 좀체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의 비난을 목도한 일이 있었다. 그 비난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짐짓 그 상황을 안도하며 관람할 수 있었던 걸지도. 나를 향한 비난이 아니었으니까. 이유는 다름아닌 사과였다. 사과가 없다는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대상이 되는 사람은 주체자에게 작은 잘못을 했던가. 잘못의 크기와는 다르게, 사람의 태도는 상황을 고무시키기도 소화시키기도 하더라고. “내 부탁이 어려우면 거절했어도 돼. 그거랑 별개로 나는 지금 무례가 불쾌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게 불쾌할 일이 뭐가 있어?” “미안하다고 하면 끝날 일이야.” “뭘 사과해야 해?” . . . 0. 미안하다는 말이 반드시 필요한가. 사랑은, 그럼 고마움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은 있었고, 반대로 말껍데기만 남은 텅 빈 것 역시 존재(부재)했다. 부재의 부재가 존재인지 부재인지, 도대체 무엇으로 분류해야 좋을지 골몰할 무렵에 나는 말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했던 것 같다. 3. 어떤 남자가 나를 더러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상했다. 그와 나의 사이에는 사랑이 일 만한 일말의 사건이 없었고 그가 건네는 말을 받아들이기에 그 말에는 나를 향한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왜?” 그는 곧장 당황했다. 뭐라고 얼버무렸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사랑이 가소로웠을까. 아니면 그 텅 빈 말이 가소로웠을까. 머지 않아 나는 그에게 실체 없음을 이유로 떠나겠노라 고했다. 4. 오랜 친구였던 이에게 나는 여전히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지낸다. 그러니까, 지금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닌 이.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서로의 고통에 함께 울었고 기쁨에 함께 웃었다. 도움이 될 만한 조언도, 도움이 전혀 안 되는 개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금은 부지불식간에 생겨버리고 마는 듯하다. 그 틈 안을 비집고 들어간 불순물과 습기가 엉겨 얼고 녹는 일을 반복하면서 금은 점점 깊어 가고 관계는 침식된다. 두동강인지 박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나긴 났고, 관계의 모양이 예전과 같지 않음은 확실히 알겠다. 한결 같음을 유지하기는 어렵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주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서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비난했다. 그렇게 완성된 상처의 크기를 서로 맞대어 보면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를 따지는 것은 영락없는 유치뽕짝이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면 나는 진작에 내 성급함과 미숙함을 사과했을 텐데, 이제 문제는 관계였다.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미안함을 건네는 것은 일방적인 일이고 그것은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나로 인해 받은 상처가 곪아 괴로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당에 내 마음 편하고자 사과를 건넬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따위의 방식으로 자위하는 것과 그리고 오랜 옛 친구가 이와 같은 일을 다시는 겪지 않는 것을 바라는 일 정도. 2.2 기실 비난의 주체는 나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나에게 염색체 절반을 물려준 나의 엄마였다. 비난의 방향은 정확히 엄마를 관통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나를 향해 있었다. 나를 향하지 않았다고 안도할 일이 아니었다. 사과하는 일이 끔찍이도 싫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미안해야 하는 일을 만들지 않았다. “나도 엄마랑 똑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지독하게도 안 해.” “그러게, 왜 이런 모습을 닮았니.” 5. 사실 나는 습관처럼 사과했다. 나와 섹스를 나눈 사람들의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섹스를 할 때에만, 그러니까 벌름거리는 보지 바로 앞에 불끈거리는 자지가 혀를 낼름거리고 있어야지만이 나는 잘못했다고 비로소 빌었다. “잘못했어요, 주인님, 제발 자지 박아 주세요, 걸레보지에 주인님 자지 박아주세요…” 내 자존심은 그렇게나 알량한 것이었다. 2.3 그 날 이불 속에서 엄마를 끌어안으며 나는 부끄러운 미안함을 건넸다. 6. 끝끝내 전달될 수 없는 미안함을 주문처럼 왼 적이 있다.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미 져 버린 생명을 떡처럼 주무르면서 나는 작년, 매미가 처음 울던 날의 아침에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0. 글을 적는 지금도 나는 말의 필요성을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은 전술했듯 텅 비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고 또 어떤 것은 말하느니만 못 하기도 하지 않던가. 어느 누군가는 천 냥 빚을 갚는 수단으로써 이용하기도 하는 말에 대해, 내가 언젠가 그 필요를 느끼는 날이 올까. 말을 갈구하게 될까. 발화하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마는 말을.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