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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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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남이 지긋지긋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여지없이 동의하는 것은 결국 내 권태가 이유일까. 아니면 관성이려나.

연초, 올해의 유일한 목표는 36번의 소개팅이라고 말했고 표면 아래에는 내 목표를 이루지 못 한 채로 서로를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군가와 허송세월하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깊었다.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하지 못 하는 데다가 내 몸을 만졌던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 세는 일을 관둔 게 꽤 오래 전인데, 이런 내가 무슨 수로 36명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릴 적 피아노학원에서 사용했던 진도카드를 다시 사 볼까. 남들 다 가지는 새해목표가 없는 게 당시에는 창피해서 딴엔 그 따위 재밌지도 않은 헛소리나 뱉었던 건데.
역시나 세어 보지 않았지만 되짚어 떠올리면 올해의 목표를 한 반절 정도는 달성한 것 같기도 하고. 진도카드에 쳐진 동그라미 중 몇 개가 진짜고 또 몇 개가 가짜였는지는 알 수 없겠다. 그제나 이제나 나는 약아빠졌다.


올해의 몇 번째인지 모를 누군가에게 투덜거렸다.
“노력 없는 관계들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제일 시시해.”
“뭐 어때. 다른 사람 만나면 되지. 세상에 남자 많다. 여자는 남자들보다 쉽게 만날 수 있잖아.”
그게 맹점이었다. 성별의 특수성은 논외로 두더라도 쉽게 만나지는 관계들은 역시나 가느다란 실오라기처럼 끊어지는 것도 쉬웠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끊어짐에 대한 아쉬움이 이제는 더 남지 않은 내 마음이었다. 나의 세상에는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대체할 수 없으니까 오히려 어떻게라도 대체하고자 했던 걸까.
조금 더 어리석었을 적에는 내가 상대방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이 상대에게 피로를 주는 동시에 나를 소모하기 때문에 결국 관계를 개선하기는 커녕 더 어그러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묵은 버릇으로 그렇게 얻은 타이틀은 ‘Cool’이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쿨한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놀라려나. ‘Uncool’이 개선을 향한 노력의 시발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면서 지내는 중인데, 과연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만일 온도를 정할 수 있다면 뜨뜻미지근한 사람이고 싶다. 가능하다면 가끔 뜨거워지는 것도 좋겠고, 뭐.

“존나 애쓰는 것도 별로지만 놓기만 하면 아무 저항 없이 종결되는 관계들은 존나, 존나 싫어. 그래서 그런가 요새는 그냥 좀 싸우고 싶다.”
언성 높여 싸워본 일이 없었다. 적어도 연애할 땐 그랬다. 운이 좋아 만난 고마운 그 친구들은 양보를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겼던 건지, 지랄맞은 내 고집을 한 번도 꺾은 적이 없었고 아집에 가득 차서 내 의견만 고수했던 나는, 그런 존중 속에서 연애하는 동안에 단 한 번도 화가 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세 시간 남짓을 잤는데도 불구하고 이튿날이 전혀 피곤하지 않은 하루들이 쌓여 한 달이 되어 갈 무렵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늦바람이 무섭댔던가, 싸우고 싶었다. 고함 지르고 비속어를 쓰더라도 이게 결코 나의, 너의 인격을 모독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 인지하고 싶었고 이 과정이 우리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할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싶었다. 서로의 견해가 얼마나 다르건 간에, 차이를 조율할 에너지를 쏟아붓고 싶었다. 벌어져 있는 간격만큼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일방적으로 우위를 독점하고 싶지도 않았고, 세상에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관계 따위 없었으며, 동일자만 찾아 방황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제외하면 아무도 찾지 못 하게 했으니까.
“어, 나도 도파민 중독자라서 싸우는 거 개좋아해. 너 잘 싸워?”
“아니, 나 좆밥이야.”


또 하루는, 여느 때처럼 잔잔한 점심시간에 누군가가 얼굴 앞 창에 대고 투덜거렸다.
“직원을 부품으로 사용하지 않는 회사가 있을까요?”
기다렸다는 듯 다른 누군가가 같은 창에 대고 답하기를,
“아뇨, 그런 회사는 있을 리가 없어요.”
그리고 나는 ‘포케도 비빔밥 아닌가’하는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환승하는 중이었다. 세 명이 나란히 앉아 포케를 비벼 먹기에 바테이블은 꽤 좁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도 결국 누군가를 부품으로써 소모하지 않았나. 당사자간의 합의만 있다면 제3자가 왈가왈부할 영역이 아니라는 것은 차치하고, 어쨌든 우리는 서로를 부품으로써 소모하기를 허용했었다. 몸의 외로움을 해소하려 만났던 사람들과는 서로의 몸을 허용한 채로 사용했었다. 또, 마음의 공허를 달래기 위해 만난 사람들은 어땠나. 눈과 대화와 목소리와 온기가 내게 주는 것이 충만함이라 착각했지만 결국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는 배웅하고서 다시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공간에서는 다시금 외롭지 않았나.
어떤 사람이 외로움에 대해 정의하기를, ‘혼자 사는 것, 모든 일을 마치고 집의 현관을 열었을 때 어둠이 반겨주는 것, 그리고 적막을 깨고 스스로 내는 소리가 공간을 울릴 때 그 울림’이라더라. 상당 부분에 동감하면서 또 다른 이가 말해 주었던 껴울림에 대해 떠올렸던 것 같다.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나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을 사용했고 더 이상 내가 그에게/그가 나에게 착취할 만한 요소가 사라질 무렵 그 관계는 흐지부지, 합의 없이 종결되거나 잠정적으로 무기한 중단됐다. 나도 그들도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톱니 하나 빠진다고 안 돌아가면 그건 기계가 이상한 거죠.”
흐름을 놓친 대화에서는 이제 스스로들을 톱니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너무 몰두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또는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두었으면 하는 마음에 동료끼리 건네는 위로의 말 정도로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캄캄한 밤에 생각하기를, 나는 빠지면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중요한 톱니가 되고 싶었던 걸까. 나 하나쯤이야 싶은 안일함을 가지고 싶지는 않지만, 나로 인해 휘청거릴 누군가(어딘가)를 떠올리는 건 마음이 꽤 무거워지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사람에게 사람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사람으로서 환대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이지만 쉼이 되어 주어 고맙다거나 하는 따위의 내가 상대방에게 진심이었던 것을 상기시키는 인사를 건네받노라면 뭐랄까, 잠깐은 마음이 말랑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여전히 여러 사람들은 “그 말을 설마 곧이곧대로 믿어?” 하더라고. 난 순진하지 않은데. 그 인사가 괜한 너스레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 것은 당사자의 진심을 매도하는 일이 되어 버리겠지.
이미 너무 늦어 버린 유치한 이야기지만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혼자라도 볕과 바람이 있으면 외롭지 않기를 바랐고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기를 바랐으며 부러지거나 쪼개지는 일에 묵묵하기를, 잎이 다 떨어지고 나더라도 시간 지나 새 잎이 돋기를 바랐다. 누구든 언제든 와서 나한테 누워 편히 쉴 수 있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음이 순간 말랑해졌던 건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계절성 외로움들을 타는 건지, 원망 담긴 그리움을 받게 되면 안부만큼이나 고마워지는 한 편 또 부럽다. 옷자락을 붙잡는 게 될까 봐 내 그리움은 쉽게 두려움으로 변질됐거든.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 만나야 할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꽉 찬 달에 조금은 빌어도 좋다면 앞으로의 내가 아쉬움을 다시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하고 싶다.
익명
내가 누군지 맞춰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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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24-09-18 21:39:42
한 마디 말이면 무너질 것 같은, 겉만 단단한 마음을 가지셨네요. 따뜻하고 성숙한 남자 만나서 펑펑 우시길 바랍니다.
익명 / 오 고마운 말씀 ㅋㅋ 실컷 무너져 볼게요
익명 / ㅎㅎ 잘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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