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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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적었던 일기 다시 꺼내 읽기 싱숭생숭해요 ㅋㅋ *** 사내 복지 차원으로 도서구입비를 지원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년을 채우고도 6개월이 찰랑찰랑하게 남은 시점에 공지로써 도착한 인사팀의 메일을, 퇴사까지 한 달 반을 남기고 그제야 차분히 읽을 수가 있었다. 수많은 리스트 가운데에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라곤 없었다. 겨우 베르나르 베르베르 정도. 근데 그이의 책도 한 번을 완독은 커녕 책장을 넘긴 적이 거의 없고. ctrl+F. 그러나 리스트 안에는 내가 찾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제목의 매력적인 목차와 내용의 책들이 꽤 많이 눈에 들어왔다. 대신할 수 있나. 아니겠지만. 엑셀을 켜서 한 다섯 식을 정리했다. 제목과 금액 그리고 eBook 이용이 가능한지에 대한 여부(실물 서적보다 훨씬 싸니까). 나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옮겨 적은 대략의 것들은 마음 챙김이었다. 당시에는 내 마음을 조금은 챙기고 싶었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이의 마음을 챙기고 싶었던 걸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오만인 동시에 모순이겠지만. 나든, 너든. 어쨌거나 최종 후보로 두 식. <떨림과 울림>과 <뮤지컬 코스모스>, 그리고 <흰>과 <검은 사슴>. 액수로 보아도 전자를 선택하고 후자를 내가 구매하는 게 나았기로서니, 더 나를 슬픔에 몰아넣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더 그랬다가는 정말로 돌이키기 어려운 일ㅡ돌이켜 생각하니 대부분의 일들은 돌이키기가 정말 어렵다. 그럴 수 있는 일들이 나에게는 거의 희박했다.ㅡ이 벌어질 것 같아서 겁났다. 전자의 책 두 권이 집으로 배송되었고, 그 책들의 지금은 표지만 슬쩍 만져진 후 책장이라고 부르기에 이상한 곳에 꽂혀 있다. 아마도 어쩌면 다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구매한 eBook. 첫 번째의 것, <흰>. 교보문고 내 서재에 이미 두 권의 eBook이 자리해 있었는데, 난 그 둘 역시 완독하지 못 한 채로 새로운 책을 들이게 됐다. 읽는 내내 착잡하게 슬펐다. 당시에만 해도 내 주변에 죽음이라곤 없었다. 적어도, 실재하는 죽음은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기도 했고, 어떤 글에 적은 것처럼 대상의 죽음을 어렴풋하게 떠올리는 것이 습관이기도 했다. 나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자주, 나의 죽음을 기획했다. 제발 죽지 말라고 피 묻은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는, 이제 막 엄마가 되기 시작한 어린 여자를 떠올리는 일이란 나에게 너무 아픈 일이었다. 아기에 동화됐을까, 엄마에 동화됐을까, 아님 그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에게 동화됐을까. 아니면 아무에게도 이입하지 못 했었나. 그래서 아픈 장면이 보일 적마다 성급히 페이지를 넘긴 걸지도 모르겠다. 울먹거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눈물이 안 나던 때이기도 했다. 아무리 쥐어짜도 고이지 않는 눈물이었다. 그냥, 어느 한 켠이 시리고 또 짜릿(하다고 표현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하기도 했다. 책 한 권을 하루에 후룩 다 읽는 사람은 못 된다. 오래 읽었다. 매일 읽지도 않았고, 어느 날엔 한 페이지를 채 다 읽지 못 했던 날도 있었다. 읽는 건 글자임이 분명한데 머리에 들어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시신경다발을 대뇌와 이어주는 어딘가가 벽 같은 걸로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찾으려 사전을 뒤적여야 하는 표현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호흡이 길어 자꾸만 되돌아가는 문장들도 아니었다. 문단들도 갈피갈피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나 오래 쥐고 있었다. 쥐고 있던 중에 아무도 예견하지 못 한 갑작스러운 죽음이 내 옆에, 내 앞에, 그리고 뒤에, 어쩌면 위와 아래에까지 몹시 또렷하게 나타났다. 죽음이 곧장 당면해 있었다. 또 한 동안은 아무 책도 펼치지 않았고 아무 영화도 들여다보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운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단 며칠만, 아주 딱 며칠만 그랬다. 다시 인라인스케이트 가방을 메고 출근했고, (기억나지 않지만)누군가를 만났으며, 외로운 저녁식사 10분 남짓하는 시간 동안에는 전과 같이 영화토막들이 함께였다. 비슷한 시기에 <흰>도 다시 펼치게 됐다. 온갖 것들이 다 친구였다. 문장 전부 죽음인 동시에 모든 표현이 애도였다. 그리고 함께 해 주는 애도는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어떤 위로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또 어떤 애도는 오히려. 오래 전, 남들이 웃음 코드, 옷 입는 코드, 영화 코드를 이야기할 때에 나는 위로 코드를 꼽은 적이 있다. 오래 슬퍼야만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곳에 꼭 우리가 함께 있기를 바란다던, 다른 한 사람을 피해가는 것을 행운이라 여기지 않는다던 어떤 평론가의 말을 감히 여기에 인용해도 괜찮을지는 모르겠다. 내 슬픔이 너의 슬픔과 같아야만 하는 이유 따위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았으면 하고, 또 내가 깊이 잠겨 있을 때에 네가 건네는 것이 조롱이 아닌 위로임을 내가 모르지 않았으면 한다. 슬픔에 있어서 오독이나 곡해는 없었으면 한다. 적어도 너와 나 둘 사이에서는 그랬으면. “사실 그거, 애도였고 슬픔이었어.” 라고 변명하기에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거쳐갈 것이므로. 책을 읽으면서, 어떤 과거의 누군가는, 미래의 수많은 나를 위했던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처연함에 목이 멨다. 실은, 꽤 오랫동안 한 번도 생각이 안 난 적이 없었다. 무얼 보아도 생각이 났고 어딜 가도, 뭘 먹어도, 누굴 만나도. 그래서 그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너를 떠올리는 일은 즐거움에 가까웠지만, 상실 이후의 내 모습들을 나는 모르지 않았으므로 결국 나에게 네 생각은 곧 괴로움이었다. 제목에 애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책을 읽더라도 그랬다. 너를 보내는 일은 나에게 애도와 크게 다르지 않는 건가 싶었다. 너는 ‘꼭 보내야 하는 거냐’며 반문하겠지만, 사실은 너도 안다. 영원은 없는 법이라 너든 나든 언젠가 뒤를 돌아야만 하는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걸. 어쩌면 이미. 그런데 <흰>을 읽으면서는 네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퍽 슬퍼하겠고 또 씁쓸해하겠지만 이내 안도하고 축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영영 네가 모르기를 바란다. 등을 돌리고 만 것은 네가 아니라 다름아닌 나였다. 언제나 비겁한 나였다. 온통 흰 것에 대해 쓰여 있는 책. 표지는 희지 않은데도 기이하게 흰 것처럼 보인다. 아마 한참을 들여다봤을 것이다.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가 눈꺼풀을 더이상 깜빡이지 않아도 눈이 시린 줄을 모르게 될 무렵, 표지가 마침내 희어져 있을 테지. 그럼 눈은 붉어져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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