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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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몇 년 쯤 지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사람은 -내 뇌가 메모리를 선택적으로 저장해서일지도 모르지만- 참 괜찮은 사람이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났을 당시에는 ‘썸’이나 ‘섹파’라는 말이 없었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뭐라 규정지어야 할 지 몰랐을 것이다. 궁금하다. 우린 무슨 사이였을까? 그 사람을 만났던 당시 난 20대 초반이나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나에겐 몇 년을 사귄, 만났다 헤어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조울증 남친이 있었고 진심으로 남친과 ‘영영’ 헤어지고 싶었지만 울증 타이밍에 빠져있는 남친에게 차마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헤어질 타이밍만 살피고 있던 어느 날 싸이월드 랜덤 파도타기였나 뭐 그런 걸로 한 남자의 미니홈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사람,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인상이 좋았다. 올라와 있는 글이나 사진으로 봐서는 평범한 회사원인 듯 했고 대인관계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은 유쾌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의 글이나 사진을 보면 우울했던 기분도 풀릴 정도였으니까. 그러다보니 그 사람의 홈피에 들어가는 일이 잦아졌고 어느새 난 그 사람의 글에 댓글을 남기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아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때인지,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날 우린 ‘실제로’ 만났다. 첫 만남, 다른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그 날 우리가 헤어지던 장면만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을 뿐. 나는 지하철 안. 문은 닫히는 중이었고 그 사람은 플랫폼에 서 있었다. 풀려 있는 와이셔츠 첫 단추, 더불어 느슨하게 살짝 내려온 넥타이. 어깨엔 갈색 크로스백이, 손엔 은갈치 정장 재킷이 들려있다. 남은 한 손으론 가볍게 손을 흔들고... 그 사람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첫 만남이 나쁘지 않았었나보다. 그러니 또 만났겠지? 두 번째 만남은 대학로에서였다. 난 평소엔 하지도 않는 화장도 하고 하이힐도 신었다. 밥도 먹었고 여기 저기 걸으며 구경도 하고 얘기도 했다. 그 시간이 정말 즐거웠지만 발이 너무 아팠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가 그 사람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그 사람은 뭐라고 애기하는 중인데 난 걷다말고 우뚝 섰다. 그리곤 하이힐을 벗어 손에 들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이 신발을 벗어 던지고 싶다는 욕구가 뇌를 거치지 않고 실행이 된 것일 뿐- 내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그 사람은 나 보다 한두 발 앞서 있었고 그 사람은 뒤를 돌았다. 대학로 한 복판에 맨발로 서 있는 나를 보는 그 사람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지나갔다. 그 사람, 아무 말 없이 신발과 양말을 벗고선... 맨발이 되었다. 난 그 사람이 신발과 양말을 벗는 모습을 멍때리며 보고 있을 뿐 아무 말을 못 했다. 맨발이 된 그 사람이 나를 향해 한 발 다가오더니 손을 덥석 잡고 걷기 시작했다. 우린 걷는 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얼마 가지 않아 마로니에 공원이 나왔고 우린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앞을 보고 있는 그 사람의 옆얼굴을 보니 살짝 미소 짓고 있는 그 표정이... 뭐랄까... 홀가분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무 말 없이 편안한 자세로 -뒤쪽으로 양 손을 짚고 앞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친 채 다리를 쭉 뻗고 앉은 모습- 앉아있는 그 사람을 보고 있으니 한마디로 표현이 안 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싶기도 하고... 이 사람이 정말 괜찮게 보이긴 한데 가슴이 콩닥대진 않고 오히려 평온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있었는지,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근처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와서 홀짝 홀짝 마시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 밖에는... 그 후로 우린 자주 만났다. 그 사람은 내 남친과는 달랐다. 늘 남친에게 언어폭력-본인은 아니라 할 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그건 폭력이자 학대였다.-을 당하던 나에게 그 사람은 ‘안식’이었다. 그 사람은 나의 모든 면을 존중해 줬다. 남친으로 인해 사라져가던 나의 자존감도 웃음도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섹스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사람과의 섹스는 나에겐 ‘신세계’였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섹스는 분위기만 기억이 되어 있지 섹스 자체가 남아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람과는 분위기보다는 섹스자체가 기억이 난다. 지금도 눈을 감고 그 사람과의 섹스를 떠올리면 온 몸에서 그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으니까... 그 사람, 잘 살고 있겠지? --- 그 사람과의 섹스 이야기도 쓰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 이야기를 쓸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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