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덤] 오지 캠핑 #1
10
|
|||||||||
|
|||||||||
↵
눈을 떴을 땐, 화롯대에서 얼마 남지 않은 장작들이 타닥 타닥 거리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 모두들 잠이 들었나보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함께 온 친구들은 모두 자기 텐트로 돌아가서 자는듯 했고, 난 이미 릴렉스 체어에 앉아서 졸기 시작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난 상태였다.
난 텐트 보다는 야전 침대에 침낭 하나 펴고 자는 것을 더 좋아한다. 불질을 하다가도 바로 잠들 수 있도록 화롯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야전침대를 하나 펴두었다. 릴렉스 체어에서 몸만 살짝 움직이면 바로 침낭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사실, 동행한 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는 산속 오지. 이런 곳에서 화롯대 앞에 앉아 불멍-불 피우면서 멍하게 있기-을 때린다는 것 자체가 아무나 즐길 수 없는 행운이라고 생각하곤 했고, 가능하면 오랜시간을 화롯대 앞에서 보내려 노력하곤 했다. 그날도 불멍을 때리다 피곤에 지쳐 잠들었던 것 같다.
인적이 없는 오지나, 일반 차량들은 갈 수 없는 오프로드길을 따라서 깊숙히 들어간 곳에서의 캠핑, 그리고 화롯대의 불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기에..
...
...
...
평소 3대에서 6대 정도의 오프로드 차량과 함께 움직이곤 한다.
물론, 대부분은 흙과 돌을 밟아야만 통과할 수 있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돌파해야 한다. 자칫하면 차가 전복되거나, 서너 바퀴 이상 굴러버릴 수도 있는 곳, 그런 어렵고, 힘든 길을 돌파하는 쾌감, 그리고 그 과정에서 뿜어나오는 아드레날린을 머릿속에 한 가득 채우려 노력하는 숫컷들만 모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여자 친구나 아내를 데려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
...
...
헉헉헉헉.... 헉헉헉...
아..... 헉... 학... 학학...
굵직한 남자의 신음 소리는 낮고, 짧게 반복되고 있었고, 여자의 신음은 점점 깊어지고, 소리는 커져가고 있었다.
처음엔 설마 싶었다. 하지만, 5미터쯤 떨어진 리오그란데 텐트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는, 분명히 남녀가 고개를 넘으려 노력 하는 소리였다. 모두들 곯아 떨어졌으리라 생각해서 시작한 것일테지만, 새벽 3시 산간 오지의 텐트는 방음 효과가 거의 없었고, 약하게 줄인 조명 덕분에 텐트 밖으로 보여지는 실루엣은 오히려 프로젝터에서 나온 영상인양 크게 과장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하악...... 학..... 헉..........학..
야.. 신음 소리 너무 커. 좀 참아봐.
하악.... 학.....으...읍...읍...
남자가 여자의 입을 틀어 막기 시작한 모양이다.
젊어서 좋긴 좋네. 남들 잔다고 새벽 3시에 서로 물고 빨고, 좋을 때다~ 좋을때야..
라는 생각을 할즈음, 신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둘의 달리기가 끝났나보다.
구지 눈을 마주쳐가며, 아는체를 하기 보다는 그냥 불앞에서 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겠지 하며, 엉덩이를 의자 깊숙히 집어 넣고 눈을 감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녀석이 불가로 나와 앉는다.
이젠 눈을 떠도 되겠지.
하품을 하면서 눈을 떠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거지? 왜 저녀석일까?
오늘 함께 들어온 차량은 4대, 그 중 한 대는 20대 중반의 D였는데, 그녀석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 당연히 D가 여친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리오그란데에서 나와서 불 앞에 앉아있는 녀석은 D가 아니라, 내 동갑내기 친구 J였다.
야... 너.... 너 어떻게 된거야?
응? 아.... 너 안잤어?
아... 뭐 그렇게 됐어. J의 겸연쩍은 표정 밑에는 야릇하게 미소가 깔려있었다.
정복감 정도 될까?
얌마, D 여자 친구잖아? 너 이게 뭐야?
아 그렇게 됐어.
D는?
내 텐트에서 자고 있어. 아까 술을 좀 많이 해서 골아 떨어졌어.
오늘은 유독 험난했던 코스를 통과하기 위해 견인바 여러 개로 밀고 당기기를 해야만 했다. 지쳐서 피곤하기도 했고, 저녁을 먹고 적당한 취기에 난 불가에서 의자에 앉아 그대로 골아 떨어졌었다. 그리고, D도 역시 오늘 코스 진입을 하며 꽤나 고생을 많이해서 인지, 저녁을 먹으며 심하게 취해버렸다. 취한 D는 불가에서 제일 가까운 J의 텐트에 눕혔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D를 눕히며, 불꽃이 튄 두 남녀는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찌어찌 해서 관계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 근데 오랜 기간 보아온 J녀석은 와이프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다른데로 눈을 돌리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사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법인가 보다. 잠시 후, 그녀도 텐트에서 나왔다. 그리고, 불가에 앉는다. J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고, 뭔가를 말하고 싶어서 나온듯 했다.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아직 술기운이 남은 것인지, 아니면 격정적인 시간을 보내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아직도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짧지만, 생기 있는 그녀의 단발머리는 어깨 바로 위에서 끝난다. 성숙해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 나이를 듣지 않았다면 20대 후반으로도 봤을 정도였지만, 실제 나이는 스물 다섯이었다. 하트가 그려진 하얀 티셔츠 위에 얇은 패딩을 걸치고 나왔지만,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그녀의 가슴은 풍만을 넘어서 터질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몸매가 드러나도록 바싹 붙은 스키니한 청바지. 누가 봐도 혹할 인물이긴 하다. 구지 산간 오지에 들어와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조용히 J의 옆에 앉은 그녀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오히려 내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 오르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야전침대에 몸을 눕히고 모르는 척 할까?
오빠, 오해하지 말아요. D는 아직 제 애인까지는 아니에요.
음............
그냥 몇 번 만난 사이고, 공기 좋고, 물 맑은데 간다고 해서 따라온거니까요.
음............... 그렇다고 해도 처음 본 사람이랑....
뭐 그렇게 되버렸네요. 아직 D와 같이 잔적은 없으니까요. 괜찮아요.
솔직히 이 산간 오지에서 남녀가 서로 부둥켜 앉고 수 백번을 잤는지, 한 번도 안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사실 개인적인 일이기에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던 일이다. 문제는 일편단심 민들레 J가 서로 알게 된지 하루도 안된 스물다섯의 그녀와 사고(?)를 쳤다는 점이었다. J는 가끔 와이프를 동행해서 캠핑을 오곤 했고, 부부가 나와 함께 열 번 이상 동행했던지라, 어느 정도의 금슬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까?
차라리, J가 길가다 만난 여자와 눈이 맞았다면 오히려 문제가 아니다. 그건 개인사이고, 개인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문제는 그 여자가 D의 여자 친구인데다, 심지어 D 마저도 아직 관계를 하지 않았는데, 그 여자를 품었다니. 하필이면 내 코 앞에서.
음.. D가 알게 되면 꽤 곤란할 것 같은데요.
후훗.. 뭐 어때요. 제가 그냥 이야기할께요.
J는 10년 가까이 한 두 달에 한 번씩은 나와 같이 오지캠핑을 다니던 친구고, J만큼은 아니지만, D 역시 함께 다닌지가 3년째다. 오프로드에서 함께 눈비를 맞아가며, 차를 밀고, 땡기고, 삽질하고, 도끼로 바퀴에 걸린 쓰러진 나무를 잘라내고, 벼랑으로 떨어질 뻔한 차량 끝에 메달려서 서로를 돕다보면, 자연스럽게 우정이라는 녀석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둘 다 내겐 소중한 친구들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여자 한 명으로 인해 우정이 깨지게 생겨버렸다.
그냥 오빠는 가만히 계세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음............................. 그래요.
J야 나 잔다.
결국, 난 그냥 비겁해지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풀릴 수 있는 일도 없고, 풀려고 해도 더 꼬일 뿐일테니, 비겁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침낭에 들어가서 바지를 벗고, 팬티만 남긴채 밖으로 다 벗어서 꺼내놨다. 침낭 속에서는 덕지덕지 입은 옷보다 속옷만 입고 자는 것이 좋다. 오히려 체온 때문에 더 따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겨울에도 속옷만 입고 자는게 버릇이 되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둘은 아직 도란도란 이야기 중이다. 장작 타는 소리와 둘의 이야기 소리가 왠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
...
...
소란스럽다.
부산하다.
뭔가를 걷어차는 소리.
물건 던지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먼저 잠들었던 D가 깬 모양이다. J와 그녀가 화롯불 옆에서 또(!) 관계를 갖는 것을 D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늦가을 새벽의 산중은 무척 춥다, 하지만, D와 J가 주먹질을 하며 뒹구는 모습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추운 것도 모르고, 팬티 바람으로 뛰어나간다. 눈가에 잔뜩 살기를 띄고 J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D.
어떻게해서든 말려야 한다. D를 필사적으로 잡는다. 발버둥 치는 D.
20대 중반의 D는 꽤나 큰 힘으로 날 밀어내려했다.
순간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왔고, 고의는 아니었겠지만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눈가에 맞았다. 별이 번쩍 보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D의 손에 맞은 내 눈가에 뭔가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D를 놓치 않았다. 이 오지에서 D는 J를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었고, 말리지 않으면 분명히 J는 크게 다칠 것이었다.
얻어 맞은 오른 쪽 눈을 뜰 수가 없다. 몇 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눈가의 이물감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양 주먹을 손으로 잡고, 무릎으로 누르고 있었지만, 그의 발길질은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었다.
잠깐만 진정하자. 잠깐만... 5분만 진정해준다고 약속하면 놔줄테니.. 잠깐만 진정해줘.
에이 씨발.... 저 씨발넘.... 죽여버릴꺼야.... 아.. 좀 놔봐 형... 좀 놓으라고!!!!!!!
나도 D의 입장이 이해된다. 나라도 어쩌면 같았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의 손을 놓는 순간 이미 포기한 듯한 표정의 J는 아마 초죽음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일반 도로까지 나가려면, 서두른다고 해도 한 시간 반을 나가야 한다. J가 죽기 직전까지 맞고 난뒤에 응급실을 찾아간다고 해도 결국엔 늦을지도 모른다. D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비극을 막아야 했다.
잠깐만... 정말.. 잠깐만.. 형봐서 잠깐만 참아 줄 수 없니?
아... 정말 씨발.. 좀 비켜봐요. 저 쌍년놈들 죽여버릴꺼야... 아아아아아아아아!!!!!!!!!!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기도 하고, 원하지 않던 모습이다. D의 발까지는 제압하지 못했지만, 손만큼은 꼼짝하지 못하도록 손과 무릎으로 누르고 있었다. D가 발을 휘두를 때마다 내 몸으로 날아들던 의자와 잡동사니도 이젠 더이상 없다. 급박한 상황을 모면하려 온몸으로 막고 있었지만, 이젠 힘이 부쳐온다.
팬티만 입고, 광기가 어린 20대를 누르고 있자니, 한 없이 화가 났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걸까? 아까 둘의 관계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 내가 잠든 사이 또 다시 일을 치뤘고, 그 소리에 깬 D가 살기를 띄고 둘.. 아니 J에게 달려들어 수도 없이 J의 얼굴을 내려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D를 막아야 했고, 잘잘못을 떠나서, 산간 오지에서 누군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 맞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
...
...
형... 나 죽고 싶어요. 내가 저 애 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J형.. 아니 저 새끼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좀 진정해봐. 어쨌거나, 좀 참아봐.
난리통에 자고 있던 두 친구도 일어났다. 한 친구는 얼굴이 온통 피범벅인 J를 챙기고 있었고, 한 친구는 D가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뒤에서 D의 몸통과 팔을 부여 잡고 있었다.
그 순간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J가 피흘리며 얻어터지고, D가 발광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만 보던 그녀. 그녀가 D의 앞으로 다가와서 귓싸데기를 올려친 것이다.
갑지기 일어난 상황에 D는 아무말도 못했고,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그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그리고, 그녀의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모든 분위기를 바꿔 버렸다.
#2에서 계속.
de Dumb square
P.S. : 배경 설명이 필요해서 첫 이야기는 호흡이 좀 깁니다. 다음 편부터는 좀 짧게 가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ㅠ.ㅠ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