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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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젤리에 대한 역사가 있다.
'이 나무엔 말이지...슬픈 전설이 있어...'도 아니고, 하다하다 할 얘기가 없어서 이젠 젤리에도 역사가 있단 말인가, 싶을지도 모를 젤리의 역사. 어렸을 때, 젤리라는 건 그저 내게 재미없는 간식이었다.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같은 건 약비날만큼 입에 달고 싶어했으면서도, 따지고 보면 다 한 가족에 들어갈 게 분명한 젤리엔 손이 가질 않았었다. 초콜릿처럼 입에 넣으면 완전히 녹아버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자처럼 와작와작 소리내어 씹을 수도 없는 젤리란 것은 내겐 너무나도 재미없는 간식일 뿐이었다. 그리고 젤리에 대한 내 생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었다. 어렸을 때보다 훨씬 다양해진 젤리들이 가게마다 넘치게 깔렸지만, 그것들이 제아무리 온갖 맛과 색깔을 뽐내도 좀체 손이 가질 않았으니. 그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젤리를 어느 날 건네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시험을 준비하던 흔해빠진 수험생이었고, 점심을 먹고 독서실로 돌아오던 참에 그 애와 계단에서 마주쳤다. 오며가며 눈인사 정도만 했었던 사이. 그 애가 처음으로 건네준 것이 하필 그 젤리였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어느 편의점에서든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포도맛의 젤리. 입에 넣으면 까슬한 질감의 설탕가루가 먼저 혀를 마중 나오는 젤리. 녹지도 않을거면서 진득하게 입안을 맴돌곤 하는 젤리. 음료수도 사탕도 초콜릿도 아닌, 하필 그 젤리란 녀석을 그 애는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작은 포스트잇 한 장과 함께. 단 두 줄에 걸쳐 써내려가진 동글동글한 글씨들이 눈에 띄었다. 그저 졸음을 쫓는데 도움이 될거라며, 힘내시라는 말을 덧붙인 종이 한 장이었다. 인생에 다시 없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나는 그 젤리에 속을 내주었다. 나는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메시지를 발견한 것처럼 그 포스트잇 한 장이 간절해졌다. 아마 누군가 내게 이승엽의 600번째 홈런볼을 주겠다고 할지라도 내가 받은 그 젤리 하나와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포도맛 젤리 하나에 얼이빠지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정말 청승맞고 궁상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반가웠다. 내가 그걸 반갑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 젤리 한 봉지가 뭐라고. 그 포스트잇 한 장이 뭐라고 그렇게 반가웠을까. 사실 그 이유를 몰랐던 건 아닐 것이다. 수험생이었던 그때의 나는 언제나 쫓기는 마음이었고, 의식하진 못했지만 무언가 위로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젤리가 더 반갑고 절실하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애가 건네준 것이 내가 언제나 심드렁하게 생각했던, 아니 관심의 대상조차 아니었던 젤리였기 때문에 더 신기하게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다 핑계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다른 이유를 갖다 붙여도 그건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그 애가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주지 않았다면, 그 포스트잇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그 젤리는 그냥 젤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미없다고 생각해서 손도 안댔던 어린시절처럼, 아무 감흥도 없는 흔해빠진 주전부리로 남겨졌을 것이다.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무엇을 건네준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빛을 가져다 주는 걸 처음 알았다. 누군가에겐 별게 아닐지도 모를, 그 사소한 특별함이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 후로도 몇 년이 지나 길었던 수험생활이 끝났고, 이젠 그 독서실에 들르는 일조차 없지만 아직도 가끔 그 젤리만큼은 사곤 한다. 처음 그 젤리를 받아들었던 그때의 마음도 아니고, 그 포도맛 젤리 역시 몇 년전의 그때처럼 여전히 포도맛 젤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 젤리를 더 이상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달짝지근함에 대해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무신경하게 포장지를 뜯어버리지도, 지루한듯이 바라볼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오히려 그 고마움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겪은 젤리의 역사다. - 2016년 수험생활을 하던 시절, 제가 어느 게시판에 올려 두었던 글이 갑자기 생각나서 가져와봤어요. 아무 이유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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