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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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초반 시절이었다.
그때 당시의 나는 순수함 그자체 였으며 10대 못지않은 풋풋함을 가지고 있었었다. 그때 당시 사귀었던 남자와 카톡만 해도 웃음이 났었고 전화를 하면 나도 모르게 설레이는 마음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데이트를 하게 되는 날에는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감추느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수줍게 남자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 평범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치기어린 사랑을 하던 나날의 연속이었고 남들과 딱히 다를게 없는 일반적인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파아란 하늘에 구름 한점 없고 창가에 따스한 볕이 들던 때로 기억한다. 혼자 내 방의 침대에 누워있다가 문득 성욕이 차올라 자위하려고 구글에 돌아다니는 야동사이트를 들어갔었다. 썸네일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홀린듯 들어갔었고 거기서 난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그렇다 지금 나와 사귀는 남자가 이전 애인과 섹스하는 과정이 담긴 영상이었던 거였다. 그동안 살면서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몰랐었다. 근데 이걸 직접 겪어보니까 뭘 뜻하는 건지 확실히 알겠더라. 정말 말 그대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표백이 되는 상태더라. 정말이지 2시간을 숨도 안 쉬고 계속 울었던 거 같다. 마치 고장난 수도꼭지마냥 계속 눈물이 흘렀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렇지만 이 일에 대해 말했다간 남자가 심한 충격을 받을게 뻔했고 나도 차마 말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날 난 내 가슴속에 묻기로 결정하고 나혼자 조용히 디지털장의사를 알아보는 걸로 결론을 냈었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다 퍼져있는 상황이었고 남자는 공황이 와 있는 상태였었다. 결국 그남자애가 나에게 찾아와서 솔직하게 말을 했다. "도화야 미안해...정말 할말이 없다...내가 죄인이고 상처줘서 미안해..."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나에게 사과하는 이유를 알아차렸었다. 하지만 난 이미 가슴에 묻기로 결정을 했던터라 일부러 모르는 척 "응?너가 뭔 잘못을 했다고 그래~지금 기억나는 잘못은 없긴하지만 용서해줄께ㅎㅎ히히♡" 이러면서 장난스럽게 말을 했었다. 그런데 남자는 오히려 더 펑펑 울며, 사실은 너가 영상본 거 다 안다고 정말정말 미안하다며 오열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 친구를 위해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말을 해줬다 "괜찮아 유준(가명)씨. 넌 잘못한 게 없어. 너가 잘못한걸 굳이 꼽으라면 넌 그때 그 감정에 충실했던 거 잖아. 그때 그 당시엔 너도 나를 몰랐고 나도 유준씨를 몰랐던 때 였어. 당신은 그때 그순간에 충실했던 게 다야. 그리고 유준씨 그대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겠어. 자신의 은밀한 모습이 공개되었다는 거에 대한 좌절과 모멸감,분노감과 우울감이 얼마나 당신을 덮치고 힘들게 했겠어. 유준씨 내가 미안해. 나의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당신의 아픔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서. 당신은 잘못한 것도,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고 당신을 먼저 돌봤으면 해. 그리고 미안해 그대의 슬픔을 이제야 돌보게 되었고 내가 부족한 나머지 당신의 숨기고픈 과거를 그대 입에서 꺼내게 했어. 당신은 내가 아는 모든 남자 중 제일 멋지고 용기있는 사람이야. 고마워 나에게 와줘서" 라고. 그리고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사랑이 뭔지.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었다. '진짜 사랑의 모습은 소비하는 게 아닌 나를 채워가는 모습이다' 이 구절의 의미가 어떤건지 그제서야 와닿게 되었었다. 사랑은 내가 하고싶은 걸,표현하고 싶은 걸 참아내는 힘이었던 거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그 사람에게 베풀고 베풂의 기쁨을 알아서 내가 성장하고, 타인이 나에게 주는 희생의 고통을 알고 기쁨을 앎으로 해서 또 한번 내가 성장하는게 진짜 사랑의 모습이라는걸. 그렇게 난 갇혀있던 세계를 부수고 사랑의 온전한 의미를 받아들였다는걸 끝내 알게 되었다. 정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걸 어떻게 차차 극복하고 끝내 내 자신을 희생하고 베풀었는지.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오려고 얼마나 울었었는지. 다시는 누군가를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다시는 누군가에게 온전한 내마음을 보여주지 못할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끝내 터널을 나와 햇빛을 마주하였고 자신있게 사람들을 만나며 웃고 살아가게 되었다.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가끔 너를 떠올린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처럼 인연에는 시기라는게 있나보다. 그이후로는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말이다. 응답하지 않을 편지지만 조금이나마 끄적여본다. 그때 나를 만나줘서 고마워. 덕분에 난 나의 한계를 뛰어넘었고 배려와 양보,헌신이 뭔지 알게 되었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유준아 이젠 빛 속에서 살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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