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불륜을 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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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논하려면 욕망의 해소라든가 충동의 해결을 위한 관점 이전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애정, 사랑, 친밀감, friend with benefit, 다 좋다. 그러나 유전자 전달이 목적이 아닌 이상 섹스의 목적은 사랑의 완성에 있고, 성적 욕망 역시 대상에 대한 정서적 유대감을 토대로 하여, 성행위를 통해 이를 더 강화시킨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성을 필요 이상으로 충동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 역시 위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도무지 내내 떠나지 않았다. 최근 몇년 전부터 바로 어제 까지... 유튜브 및 각종 SNS부터 성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며, 누구나 자유롭게 성충동을 해소해야 한다는 계몽을 넘어 과도하게 주입되어, 지켜져야 더 가치있을지도 모를 내밀함마저 무방비하게 준비 없이 노출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섹스란 게 두 남녀 혹은 동성 커플의 친밀감과 애정의 완성과 확인을 위해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묶는 의미있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인스턴트적으로 만나서 쉽게 섹스하는 일이 합법적인 것은 물론이고,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 시대에, 지금 당장 스마트폰 홈메뉴 갤러리만 들어가봐도 상품화된 나체의 여성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스스로 지성인임을 자처하던, 보수를 대변하는 언론사 온라인 판에서도 선정적인 주요 부분을 클로즈업 하고 유혹하는 반나의 성인들이 사이즈 확대며 성만족을 위한 각종 상품들과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한 광고를 백두대낮 어린 아가들도 클릭할 수 있는 흔하고 흔하게 광고하는 시대에 온갖 성적인 행위와 성기를 뜻하는 금기어들이 지면 가득 채워져 있지만, 완전히 발가벗은 사람들로 우굴대는 목욕탕에서는 성적인 흥분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은밀한 19금의 성애 소설과는 달리 외설적이라는 느낌마저 도덕적인 양심에게 묻힌다. 이건 섹스에 너무 미숙하고, 사랑을 매개로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혹은 나는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을 싣지 않은 섹스는 '성애'가 아닌 동물적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그럴까?) 불과 설연휴에 그의 와이프와 함께 음식을 주고 받고 내 연애를 걱정해 주던 사이였다. 어떻게 같이 일하는 두사람이 가정이 아닌 동료에게 연민을 느낀 걸까... 어째서 그 모든게 순식간에 모두 흩어지고 사라져 버린 걸까 어째서 그 불꽃을 마음 속에서 키울 수 없었던 걸까 어째서 그 기억을 간직하고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걸까 그러니까... 결국 그러니까... 그와 그녀의 원칙은 변하기 쉬웠던 걸까... 마음은 액체처럼 유동적이었다. 모든게 쉴 새 없이 변형되고 변질되었다. 나의 정신력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정신의 본질은 모순으로 이루어졌다 오래전, <프랜즈>라는 시트콤에서 로스가 결혼식장에서 자신의 신부의 이름을 레이첼이라 잘못 불러 결혼이 깨졌던 에피소드를 기억이 난다. 첫사랑이었던 레이첼은 로스의 무의식 속에서 언제나 '나의 신부'였던 모양이다. 그녀와 사귀고, 그녀와 죽도록 싸우고, 그녀와 헤어지고, 그녀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이제 행복의 길로 접어들려는 찰라에, 그녀의 이름이 결혼식장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 달콤한 언어로 결국은 마리아를 굴복시키고 이제 엘레나를 극복하고 사랑의 완성을 이루던 그 중요한 순간 안드레이는 마리아 대신 엘레나 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양다리의 최후는 이렇듯 허무하다. 바람을 필 때, 양다리를 걸칠 때, 과거의 연인을 극복했을 때, 분명히 실수는 일어날것이다. 그가 실수 할 때 나는 알고서도 모른채 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그에게 경고를 고해야 할까...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둘중에 한명은 파멸로 가는 것일 텐데... 차라리 파멸 했으면 싶은 유혹 같은 걸 느낀다. 나도 결국엔 쓰레기의 동료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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