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남이 썸녀와 자고 싶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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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픽션 입니다. “압생트 라… 너무 궁상맞은 거 아니에요?” 나는 기다란 바 구석에 혼자 앉아 압생트를 홀짝이고 있었고 역시나 궁상맞은 일이었다. 영롱한 푸른빛의 악마의 술이자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를 때 마셔 더 유명해진 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위스키 패키지에는 고흐의 자화상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면도날을 손에 쥐었을 때 고흐는 도대체 어떤 기분에 취해 있었을까. 고흐은 자신의 귀를 내어줄 정도로 그림의 가치가 있었던 걸까. 세상에는 단 두 부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타인을 죽이거나 아니면 자신을 죽이거나. 고흐는 분명 후자였던 것 같다. 그는 뚝뚝 피를 흘리며 병원에서 둥둥 붕대를 귀에 둘러맨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자기를 파괴한 자의 결과치곤 비참하다. 당시 나는 미술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냥 흔한 모던BAR 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그녀가 이 BAR이 있기 때문에 자주 오고 있었다. 소주한잔이 주량인 내가 마치 고흐처럼 나를 죽이면서 70도의 압생트를 마시는 이유는… 그녀가 내게 매우 가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빈 의자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아있었다. 그녀 쪽 테이블에는 서빙된 지 꽤 됐는지 흐물 해진 코스터에 안착한 얼음잔과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춰진 피스타치오 몇 알이 놓여있었다. 그 사이로 아이폰이 자로 잰 듯 정갈하게 배치돼 성경처럼 고귀하게 어디선가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답장이 오지 않는지, 혹은 기다리는 걸 포기했는지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결심했다는 듯 얼음이 덜컥 일 때까지 칵테일을 비워냈다. “압생트 너무 궁상맞은 거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끄덕임 만으로도 이 하루를 충분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는 빈 잔을 바텐더에게 들어 보였다. 토마토를 뒤섞은 술. 의역하면 피의 메리. 직역하면 빌어먹을 혹은 때려죽일 메리.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가 가톨릭을 국교로 세우고 성공회와 청교도를 심하게 탄압하자 부여된 별명이었다. “오늘도 혼자 궁상맞게 압생트가 뭐에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상한 낌새를 느낀 푸들 마냥 내 어깨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몸둘바를 몰라 가만히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이 술이 제일 땡기게 되어 었어.” 그녀는 피식 웃으며 코스터 위에 새로 리필된 피의 메리를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멘트치고는 너무 뻔한 것 아닌가?” 이 재미없는 이 새끼는 뭐지? 라고 그녀의 얼굴이 쪼그라뜨린 콜라 캔처럼 짜부러졌다. 나는 아무런 변명 없이(사실이었으니까)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약 10초 간 무심한 눈 맞춤으로 증명하고 그녀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말보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솔직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술을 먹는 것 조차 버거운 일이니까….” 그녀는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 단숨에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어깨가 출렁이는 파도처럼 약간 움찔했다. “나는 이미 예전 부터 알고 있었는데…. 도데체 며칠 째 압생트 한병을 다 못마시고 있는거에요?” “글쎄… 올해 안에는 다 마실 수 있을련지…” “나한테 관심 받고 싶은 거라면 입생트 말고 다른 걸 시켜보는 어때요? “훗… 거절할께..” “왜요?” “지금 이걸로도 벅차.” “………”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난 여자다. 아니면 상상력이 풍부한 걸지도. 그녀는 이미 내가 겪어야 했던 일련의 에피소드를 넷플릭스를 정주행 하듯 한 번에 몰아 본 느낌이다. “당신은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텐데…” “내가 당신에게 관심이 끊어지기 전에 당신은 나에게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걸요. 그러지 않으면 마시지도 못하는 압생트나 가지고 집에나 가버려요. 어떡할꺼에요?” 그녀가 세 잔 째의 블러디 메리를 주문하고 내게 물었지만 나도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알았다면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음…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군.” 다음은 또 뭘까. 나는 불안에 떨며 장막이 걷히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내가 압상트를 마시는 이유는 고흐 때문이야… 압생트에 왜 고흐 자화상이 붙어 있는 줄 알아?” “고흐는 압생트의 노예였어 그 시대 압생트는 창조와 파괴라는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자유와 영감을 갈구하는 예술가들을 유혹했지. 고흐가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간 이유는 귀를 잘라서가 아니라 압생트를 끊어내기 위한 거였어. 압생트 없이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 하지만 고흐는 압생트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을 알게되…” “고흐가 압생트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동생 테오게 쓴 편지가 있어…” 이제와 생각하니 쓸모없는 일 같지만, 나는 너에게 정말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내 작품에 삶 전체를 걸었고 그 과정에서 내 정신은 무수히 괴로움을 겪었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내게 그저 평범한 환상이 아니었고 항상 소중한 존재였다 “고흐에게 압생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알을 깨고 나오도록 창조적인 영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의 달콤한 유혹에는 숨어 있는 독이란 것도 알고 있었지” 한참을 설명하다 생각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완전히 경계를 해지하고 100%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쓱 시간을 확인하고는 솔직히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오늘이 지나면 나를 스쳐갈 또 다른 사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일상이라는 셔터가 내려가기까지 고작 삼십 분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은… 너 때문에 압생트를 먹게 되..” 그녀는 가만히 내 얘기를 듣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알고 있었어요. 실은 고흐보다 압생트보다 당신이 궁금한건데… 방금 이야기가 제일 흥미 있네!” 그녀가 피식 웃어 보이고는 물었다. “후회해요?” “글쎄… 오늘 이후로 압생트를 마실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압생트 만큼 유혹적이였어…” 기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굳이 생각하라면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고흐처럼 압생트를 끊어 내기 위한 압박과 비슷한 기분이 아닐까.” 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불이 붙은 담배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독한 담배를 한 번 더 크게 빨아들였다. “방금, 대단히 가식적인 대답이었어요.” 담배가 목에 걸렸는지 기침이 나왔다. 아마도 연기가 식도로 넘어간건지 나도 모르게 압생트를 원샷으로 들이키고 말았다. 타들어가는 느낌이 연기보다 더 쎄한 느낌으로 가슴을 움켜 집을 수 밖에 없었다. “지난달 나에게 고백한 남자도 내가 같이 자지 않으니까 오늘부로 연락을 끊었어. 어차피 당신도 나와 잘려고 지어낸 이야기들 아닌가?” “결국 남자들은 여자와 같이 자볼려고 처음부터 좋은 말로 유난을 떠는거에요. 담배도 못피는 당신 처럼!” 켁켁거리며 목을 잡고는 그녀의 말에 반문 했다. “불안하니까…” “뭐라고요?” “불안하니까 그런거라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남자는 당신같은 매력적인 여자가 관심을 가져주면 그때 부터 불안해… 당신의 마음이 언제부터 변할지 나한테 확실히 마음이 있는지 확인 받고 싶어지지 연락을 주고 받고 수십번 만나도 당신에게 확인받고 싶어 할 꺼야.. 당신같은 여자는 어느 남자나 관심을 보일 테니까... 섹스는 그냥 섹스가 아니야 확신의 섹스가 필요한거지… 압생트가 유혹적인건 취하면 취할 수록 확실한 영감을 남기게 되… 아마 너와의 섹스는 압생트 같은 영감을 주었을 거야. 확인 받고 싶어서 겠지… 켁켁..” 그녀는 내가 나아질 때 까지 한동안 나를 뻔히 바라보고는 바텐더에게 물을 받아 건네 준다. 물을 들이키고 나서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내 상태가 가라앉았다. “그러면 당신도 나와 자고 싶어요?” “글쎼… 나는 당신을 보면서 자는 거 까지 상상해 본적은 없어… 말없이 압생트를 마시는 것 만으로도 벅찼으니까.. 당신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고 나도 당신에게 환심을 끌려고 압생트와 씨름 한 것이였지…” 그녀가 나를 보며 핸드백에서 펜과 머리끈으로 살며시 머리를 묶는다. “그래요? 그러면 오늘 부터 상상해 봐요.. 누가 알아요? 이루어 질지? 그리고 내일부턴 압생트 말고 모스카토나 마셔요. 알쓰 주제에 폼 잡기는…” 그녀는 압생트를 뻇고는 내 손바닥에 자신의 번호를 적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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