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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의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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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Life Al Capone
카탸 메드베데바




약 5만∼6만 년 전 현재 인류의 선조 격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는 다른 부족의 사람
을 만나 고작 한 시간 정도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반나절
이상을 걸어서 이동하였다고 한다.
우리 인류라는 종은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공유하고 
싶은 근원적인 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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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저녁시간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2. 의 집에 모여 
여러 가지 주제로 담소를 나눈적이 있다.
때가 때이니만큼(코로나 시기) 배민으로 각자 취향에 맞는
안줏거리를 시키고 술은 친구집에 키핑해둔 양주와 내가
챙겨간 스페인산 와인 ‘마츠 엘 비에호’를 쇼핑백에서 
꺼내니 친구2.가 한마디 호응을 해준다.
"웬일로 할아버지 와인(라벨에 할아버지 사진으로 와인의
숙성도를 구분할 수 있다) 을 가져왔을까? ㅎㅎ
칙칙한 남자들끼리 말고 좀 특별한 날에 따야 하는 거 
아니야?“

"와인에 용도 같은 게 어디 있냐?
마개를 따야 할 때만 있을 뿐이지. 
의미 따윈 개나 줘버리고 마셔야지?!“

대화 시작의 주제는 정치, 문화, 사회, 예술, 가십 등 다양했
지만 결국 우리 세 남자들의 대화는 이성에 관한 내용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우리 셋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의 첫 장면처럼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공간 속에
채우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하던 친구 1. 은 와인이 
바닥을 보일 때쯤 얼마 전 그의 이별 이야기를 살며시 
꺼낸다. 외롭게 사는 사람은 항상 그 영혼 속에 기꺼이 
이야기하고 싶은 무언가를 품고 사는 법인가 싶다. 도시의
독신남이 단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꽤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참석하여 자기의 영혼을 쏟아놓는다.

(친구 1.) 
“너희도 알다시피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야.
한때 그녀의 시선, 나에게 내밀던 손, 즐겨 입던 여친룩과
헤어스타일, 목소리, 잘 맞는 우리의 속궁합은 매번 내 
인생에 무언가 새롭고 특별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게 
해주었던 거 같았어. 
우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각자의 생각에 
잠겨 한참을 말없이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라운지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있기도 했지만 지루함을 느낄 틈은 없었어.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우리는 권태에 중심에 들어섰고 
더 이상 우리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을 무렵 우리는 침묵하
고 또 침묵하게 되더라고..
사소한 의견 충돌이 생길 때면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내게
짜증을 내곤 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내 의견에 동의하
지 않았고, 내가 누구와 논쟁을 벌인 내용을 이야기하면,
항상 상대의 편을 들더라. 
내가 무언가를 떨어뜨리면 한숨을 쉬며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일은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어.
또 그녀와 식사를 마친 후 계산할 때 깜빡하고 지갑을 차에
두고 왔을 경우엔 이렇게 말하더라. '그럴 줄 알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더군. 그런 짜증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내 정신이 서서히 말라간다는 느낌이랄까? 이러한 부정적
인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쌓이더니 결국엔 우리에게도 이별
의 시간이 찾아왔고 지금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친구 1.의 에피소드에 대해 꽤나 오랜시간 각자의 입장에서
공감과 이성적, 감성적 의견을 적절히 배합하여 말하게 
된다. 
중요한 건 둘만이 알 수 있는 둘만의 일이라는 것이다.
대화가 무르익을 무렵 친구 2. 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최근 만나고 있는 은밀한 파트너에 관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친구 2.) 
“FWB와 무언가를 채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잖아.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채우다니? 뭘? 
베니스의 상인처럼 해상무역을 통해 재화를 채우겠어? 
정서적 가치? 혹은 감정? 글쎄...
나와 그녀는 뭔가를 채우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낭비하기 위해 만나는 거야. 우리는 시간과 욕망 그리고 
체력을 함께 소비하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낭비하는 것은
바로 섹스라는 관념이야. '그녀와 은밀한 섹스를 나눈다'라
는 무거운 관념 대신 쌓아 놓은 정욕을 홀홀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있는 거야. 
독일 관념론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섹스라는 이름의 
초콜릿 상자를 공유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은밀하게
우리 둘만 달콤하게 먹고 즐기는 것이지. 
그 상자가 노출되지 않는 한 우리 관계는 안전해."
 
친구 2. 와 만나 초콜릿을 낭비하는 여자의 존재는 골프
모임에서 만났다는 한 여성이다.
내가 질문한다.

"둘이 보통 한 달에 몇 번이나 만나?"

"대중없어. 매주 만날 때도 있고 한 달에 한 번도 못 만날
때도 있어. 근데 그건 왜 물어?"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성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잖아.
근데 한 달에 한 번이라고? 그날이 다가올 때까지 너의 
철학적 정신 곳곳에 섹스를 해야 한다는 관념이 쌓여서 
밤꽃향을 풍기고 있겠구나ㅋㅋ." 
(친구 1. 과 나는 깔깔대며 약을 올린다.)

친구2. 가 온더락 잔을 손으로 뱅글뱅글 돌리며 내용물을
희석시키는 듯한 행동을 한다.
할 말은 있는데 하지 못하거나 약이 오를 때 하는 짓이다.
한참을 그러더니 미간을 좁히며 삐딱하게 물어본다. 

“그러는 넌? 요즘 어떤데?”

“음... 나는 글쎄다. 내 이야기는 재미없어서. 나중에~”

하지만 오랜만에 새삼스럽게 그들의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 
친구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삶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히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해보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어떻든 그날의 술자리에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서로에게
약을 올리고 미미한 신경전이 있었음에도 결국 모두가 
즐겁게 웃었던 밤이었다.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나는 여느 때보다 적적한 기분을 
느꼈다. 나 혼자만이 그 술자리에 익숙해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도대체
나는 어떤 풍경이 익숙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친숙한 광경은... 
.
.
.
.
.
.

불현듯 누군가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던 기억을 천천히
상기시킨다.

“자책하는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노력을 다하더라도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죠.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그냥 내버려둬요.”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사피엔스의 후예일 뿐이다. 

fin.



 
마호니스
아르카디아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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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샤 2024-05-04 00:51:16
읽다가 투르게네프에서 멈추며… 투르게네프 제가 너무 좋아하는데..특히 찻사랑도 .. 전 끝이 좋았어요.. 전 연상이나 상상하며 읽는 편이라.. 쎄하고 서리고 저리고 허무함이 여즉 느껴지네요! 희한한 사건까지도 포함해서요. 제가 왜 아(아)샤겠어요 ㅎㅎ 투르게네프때문에 설레어서 멈췄는데 다시 읽어 내려깁니당
마호니스/ 오랜만입니다. 아아샤님^^. 저도 매우 잘 본 작품입니다. 특히 아버지가 아들 페트로비치에게 남긴 편지도 인상적이구요. (그 황홀함을. 그 독을..) 아아샤님이 왜 아아샤님인지 잘 알지요~ㅎㅎ 연휴 편히 잘 보내시구요!
아아샤/ ㄴ생은 실전이라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구 아빠 나빠 정도로만 교훈을 얻었어요.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상상도 하구요 >_<
미녀39세 2024-05-03 00:17:47
반나절이나 걸어가서 그냥 정보만 공유하고 왔을리가 없을텐데…서로 번식도 하고 그랬을 것 같아요 ㅎㅎ
주 목적은 번식이고 나머지 50분 정보공유
마호니스/ 생각해보니 그렇겠네요. ^^ 언어가 매우 한정적이었을 것이고, 주로 몸의 대화(?)가 대부분이었겠지요. 그러니깐 몸의 대화 50분, 번식 10분이면 한시간 내내 섹스만? ㅎ
밤소녀 2024-05-02 21:58:02
오랜만의 마호님 글 잘 읽었어요~~순리대로, 사는것이 쉬운듯 어려운거..나를 비워야 내가 채워지는거 아님니까 ㅎㅎ
마호니스/ 오랜만입니다. 소녀님^^. 잘 읽으셨다니 늘 고마워요. 네. 말씀처럼 나를 비우고 사는것이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겠지요. 예전에 비해 힘은 좀 빼고 (곧휴 힘은 유지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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