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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 감각 美的感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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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홀에서는 꽤 오래 전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소장품 기획전 감상 (행여라도 읽어보실 분은 여기) 이후로 예술에 대해서는 두 번째로 글을 쓰는 듯하다.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예술 강연이 있었다. <미적 감각, Aesthetic Sense>
예전에 한 학기 동안 도슨트를 한 적이 있어 애착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자리를 꽉 채우고 계단에도 걸터앉았는데 바둑돌을 가득 채운 것과 같은 질서정연한 빽빽함보다는 곳곳에 열매가 매달린 느낌이 들었다. 이곳을 설계한 렘 콜하스 Rem Koolhaas의 건축철학인 공간의 연속적 흐름과 나선형 공간이 이렇게 빛을 발하구나 싶다. (엄밀히 이 공간은 사람이 없더라도 어디가 자리이고 어디가 계단인지 바로 알기 어렵다.)

3개의 세션 가운데 강연자가 직접적으로 이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섹슈얼리티'를 다룬 두 번째 세션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글은 내가 기억하고 기록한 강연자의 설명과 나의 감상 및 연상이 혼재되어 있다. 

구체적인 컨텐츠를 가늠하지 못한 나로서는 꽤 파격적인 비주얼의 연속이었는데 다른 청중은 어느 정도의 마음가짐 혹은 사전 이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티노 세갈 Tino Sehgal의 <키스 The Kiss, 2015>였다.
남녀가 미술관 바닥을 뒹굴며 키스를 한다. 청중은 약간 소란스럽다가 고요해졌다. 이것은 예술인가.


작가는 사진이나 동영상과 같은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촬영되고 보존되었다. 강연자는 지금 이 순간, 실물과 마주하는 경험과 사진을 보는 경험은 별개라고 말한다. 그렇지, 구겐하임에 들렀는데 난데없이 남녀가 뒹굴고 있어. 이거 뭐지? 하면서 우리는 내재된 새로운 감각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뒹굴며 키스만 하는 것으로도 예술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작품은 명작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키스를 재현한 것으로 작가에 의하여 고도로 의도된 시퀀스를 따른 연기였다. 로댕의 키스나 클림트의 키스 등 우리가 알 법한 키스의 순간이 마치 영화 시네마천국, 1988의 시그니처 씬처럼 이어진다.


Auguste Rodin, The Kiss, 1901-1904 (출처: tate.org.uk)


Gustav Klimt, The Kiss, 1907 (출처: gustav-klimt.com)


강연자는 자연스레 우리 몸의 구멍에 대해 이야기했다. 구멍은 어떤 역할을 할까. 강연자는 나와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거나 무언가를 외부로 내놓는다면 대개는 구멍을 통한 것이다. 눈, 코, 입, (강연자는 다른 표현을 썼지만) 보지, 자지, 땀구멍까지.
이 작품은 행위자로서는 입을 통한 감각의 자극, 그리고 관객으로서는 눈을 통한 시각적 자극과 더불어 기억정보와 연결되어 과거 자신이 키스할 때의 감각을 소환한다.

위대한 백남준 작가의 아내이기도 한 구보타 시게코 Kubota Shigeko는 <질 회화 Vagina Painting, 1965>를 선보였다. 이것은 예술일까. 


붓으로 페인트를 흩뿌려 파격을 선사한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또 하나의 행위예술로 평가받는다. (한스 내매스 Hans Namath는 폴락의 작업을 촬영하여 작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시라가 가즈오 Shiraga Kazuo는 발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면 질로 그림을 못 그릴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예술로 승화된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이성에서 감각으로, 그리고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한 '행위'가 예술로 인정받는 순간이다.

오노 요코 Ono Yoko는 관객이 무대에 올라 작가의 옷을 자르게 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Cut Piece, 1965). 그녀가 의도한 것은? 수동적인 작가와 능동적인 관객. 주체와 객체가 도치되며 우리의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그녀가 연인이었던 존 레논 John Lennon과 함께 벌인 반전 침대시위 (Bed-ins for Peace, 1969)가 생각났다. 그리고 레홀독서단에서 성적 해방을 중심으로 이 시기 68혁명을 살펴본 기억도 소환. 

Ono Yoko, Cut Piece, 1964 (출처: paint2et.wordpress.com)

선구적인 여성주의 예술가로 불리는 캐롤리 슈니먼 Carolee Schneemann은 <눈 몸: 36가지 변형 행위들 Eye Body: 36 Transformative Actions for Camera, 1965>을 작업했다. 여성의 정체성을 강조한 이 예술활동을 통해 작가의 몸은 시각 또는 행위 예술의 소재, 혹은 예술의 한 장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Carolee Schneemann, Eye Body: 36 Transformative Actions for Camera, 1965 (출처: elephant.art)

브루스 나우먼 Bruce Nauman은 <샘으로부터의 자화상 Self Portrait as a Fountain, 1966> 프린팅을 선보였다. 그는 장식용 분수대의 오줌싸개 조각상을 흉내내지만 입에서 물을 뿜는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의 <샘 Fountain, 1917>에 대한 오마주. 똑같기만 하다면 예술이라 하기 어렵겠지. 뒤샹이 산업용 소변기를 미술관으로 가져왔다면 나우먼은 그의 몸을 통해 기성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Bruce Nauman, Self Portrait as a Fountain, 1966 (출처: whitney.org)

목숨 내놓고 예술하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c의 작품에 대한 해설도 들을 수 있었다. 예술은 아름다우니 예술가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이분의 작품세계는 새롭고 놀랍고 의도한 대로 아름답다.

짧은 시간에 수 십 편의 작품 해설을 듣는 것은 선물이었다. 큐레이터가 주제에 맞춰 작품을 선정하는 것처럼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강연의 제목이기도 한 감각의 미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 무엇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예술을 경험하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 전시는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지 다녀간 인증샷을 찍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울림이 있다.

오디토리움의 한 쪽 면을 채운, 에로틱할 수도 풍자적일 수도 있는, 벌거벗은 사람의 몸 혹은 무언가를 암시하는 어떠한 행위의 예술작품을 꽤 점잖아 보이는 많은 사람과 함께 감상하며 해설을 듣는 상황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2016에서 이즈미 히데코의 소설 낭독회를 떠올리게 하였다. 물론 음란을 즐기기 위해 (그것이 나쁜 것인지는 차치하고) 이곳에 온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극속의 낭독은 외설적 설정이지만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예술이니 우리는 그 외설의 순간을 예술로 대할 수 있었다. 이곳에도 예술을 감각하는 너저분하지 않은 긴장과 흥미로움이 흘렀다.

그러면 왜 미적 감각을 기르거나 미적 대상에 노출되어야 하는가. 의무는 아니겠으나 지각할 수 있는 충분히 좋은 감각 기관을 내버려 두기엔 아깝고 삶은 빠르게 흐른다. 감각이 날카로워지면 음미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대개는 그 순간이 즐겁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기니까 누릴 수 있다면 누려야지. 

추신. 
미적 감각 美的感覺 aesthetic sense, sensibility
미학 상의 용어. 미적 대상에 반응하는 감각 기관의 기능. 시각, 청각 등 고급 감각이 수위를 차지하나 종종 미각, 후각, 유기 감각, 운동 감각 등의 하급 감각도 함께 작용한다. 이러한 감각은 감정, 의지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들 여러 기관의 협동에 의해 대상을 전체성과 직관성을 가지고 파악하는 것이 미적 감각의 성립 조건이다. 이와 같은 감각만이 개념에 의거하지 않고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닌 미적 판단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미적 감각은 미의식의 수용적 측면, 미적 판단은 능동적 측면인데 실제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련을 가지고 나타난다. (출처: 월간미술 monthlyart.com)
유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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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누구 2024-07-22 07:21:39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가지 궁금한점도 있습니다. "해설이 필요한 작품들이 좋은 작품인가?" 저는 예술학도도 관련업종에 종사자도 아닙니다. 그저 기회 될때마다 전시회나 사진전을 보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간혹 난해한 작품들을 만날때 (사전지식없이)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유후후/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예컨대 발렌타인 30년산을 마셔보니 쓰기만 한데 이게 왜 좋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직관적으로 맛있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위스키를 좀 알아야 비로소 좋다는 감각을 가질 수도 있고 술을 아주 좋아하지만 내 입맛에는 이건 아니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좋은 것'은 대체적으로 다수의 평가에 따르기는 하지만 개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다수결에 의한 원리가 적용되는 영역도 아니기 때문에 대중성과 예술성이 비례한다고 보기도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그냥 보면 잘 모르지만 알고 보면 좋은 경우가 있잖아요. 어려워 보이지 않는 미묘한 붓놀림과 손동작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지 못한 발상이 가져오는 신선함 혹은 문제해결이 얼마나 머리를 맑게 해주는지,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드는 것은 예술이 아니더라도 여러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니까요. 이미 대상은 그 차이를 품고 있지만 우리가 그 세계를 잘 몰라서 못 알아차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술을 더 많이 향유할 수 있는 심미안을 기르고 때때로 모르는 것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나서 알아차리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어디누구/ 명쾌한 답변 감사합니다. 급 예술이랑 친해보고 싶네요 ^^
아뿔싸 2024-07-22 07:21:29
존카메론 미쉘 감독의 <숏버스> 를 한번 추천 드리고 싶네요^^
글 잘 봤습니다.
어디누구/ 섹스에 만족해본적 없는 섹스테라피스트 소피의 이야기? 정도 될까요? 흥미롭게 봤습니다. 여러가지 "성"을 한자리에 모아놓은듯한...... 소인도 추천합니다!
유후후/ 추천 고맙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보았어요. 숏버스는 내용도 발칙하지만 사실상 극장 상영이 어려운 '제한상영가'라는 등급 결정을 취소한 판례를 남겼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네요. 그리고 언젠가 미첼 감독이 직접 출연한 헤드윅 공연을 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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