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병이라는 난이도 극상이 현실화되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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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아이러니하다. 19세기 일본이 조선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중국(청)이 종주국으로 버텼고 러시아의 관심도 컸으며 영국과 미국도 조선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부정부패가 대세를 바꿨다. 10년 전 임오군란 때 살해 위기를 겪은 민비는 탐관오리의 전횡에 분노한 동학군이 북진하자 바로 청군을 요청했다. 이것이 역사적 패착이었다. 일본도 텐진조약을 근거로 즉시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 군대가 출동하자 동학군은 자진해산했고 청군도 동시 철수를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경복궁을 습격하여 고종을 포로로 잡고 청군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 청일전쟁이 개시된 것이다. 예상과 달리 대국인 청은 별다른 전면전 없이 일방적으로 계속 후퇴했다. 리훙장이 자신의 사병을 아끼려 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조선에서 손을 뗐다. 일시적으로 일본이 조선에서 우세를 누렸지만 서구 열강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공동으로 일본의 랴오둥 반도 반환을 요구했고 일본은 바로 굴복했다.(삼국간섭) 민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조선에서 일본 세력을 축출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에게 살해됐다.(을미사변) 국제적 비난 속에 일본은 위축되었고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일본은 조선에서 세력을 일시적으로 잃었다.(아관파천) 고종은 이권을 여러 열강들에게 나누어주어 조선을 한 나라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이이제이 전략을 취했다. 그 와중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으며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은 완충국 또는 중립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그런데 의화단의 난이 이 모든 분위기를 바꿨다. 중국에서 서양을 배척하는 민란이 일어났고 서양인들이 살해됐다. 러시아는 이를 핑계로 만주에 수십만 대군을 출병하고 완전히 점령했다. 이에 놀란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견제했다. 의화단의 난과 러시아의 만주 점령이 없었다면 영일동맹은 없었을 것이고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완충지대로 하는 협상을 맺었을 것이다. 영일동맹으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러시아를 기습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국내 공산주의 혁명으로 대혼란에 빠진 러시아는 전쟁에서 손을 뗐다. 일본이 조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조선말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정의로운 동학농민운동과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야기된 국가수호적인 의화단의 난이 없었다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는 어려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부의 부패와 외부의 침략이 가져온 나비효과. 그것은 참으로 기괴한 나비효과였다. 러일전쟁 패배로 극동으로 진출이 막힌 러시아는 유럽 쪽 발칸반도로 진출하려다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충돌했고 1차대전의 원인이 됐다. 조선을 먹은 일본은 훗날 만주와 중국까지 침략하게 되면서 2차대전의 원인이 됐다.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일으켰지만 그 훨씬 전에 조선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의 전횡에 분노한 녹두장군 전봉준의 의로운 봉기가 거대한 나비효과의 첫 파동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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