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나르시즘의 시대...에로스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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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찍고 자해하는 변태적인 현대사회...셀카 찍는 당신, 자해하는 것과 같은 이유 우리에게 사랑이 불가능해진 것은 타자(他者)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자의 발견을 위해 자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상처 받기를 싫어한다. 나는 타자가 없는 공허함을 이겨내기 위해 점차 나르시시즘으로 빠져들 뿐이다. '셀카'나 자해 등으로 자아를 확인한다. 한 교수는 그 궁극적 책임이 신자유주의에 있다고 본다. 성과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개개인은 타자뿐 아니라 스스로를 착취하기에 이른다. 사랑이나 우정, 연대 따위는 삶에 도움을 주지 않는 것들로 여겨진다. 신자유주의선 상처 안 받으려 사랑도 '경영' “사람은 스스로 자아를 만들 수 없다. 타자와의 연대가 있어야 자아도 있다”면서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연대를 끊어버린다”고 말했다. 현대인들은 “사랑도 상처받지 않기 위해 ‘경영’한다”며 “사랑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이익을 분산해 절대적 손실이 없도록 한다” "셀카와 자해는 같은 원인서 비롯" "'만족스러운 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선물"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런데 현대사회에 들어서 타자가 없어지면서 자기 자신 또한 사라지고 있다" 현대인에게 타자는 자신을 사랑해주고 나를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페이스북에서 '좋아요'처럼 자기확신을 가져다주는 거울이나 성적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타자가 사라지다 보니 현대인은 자기 속에 몰입하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자기 자신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한 교수는 "우리 사회는 이런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밖에서는 셀카를 찍고 집에 들어가서는 자해를 하는 변태적 사회로 변하게 됐다"며 "자기 자신을 찍거나 직접 손목을 그어 피를 흘리는 행위로 자기를 느끼려는 것" "사랑이 사라진 시대, 나르시시즘만 남았다" “신자유주의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각자가 기업’이라는 말을 하면서 연대를 끊어버린다”고 지적했다. “연대가 있어야 만족스런 자아가 생기는데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는 연대, 연결, 사랑, 친구, 이웃이 끊어지고 모두가 ‘나’ 안에 침몰해버리고 만다”는 견해다.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 지금의 사회가 사랑에 빠지는 걸 힘들게(혹은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우울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 빠지는 게 힘들어서 우울해지는 것인지 하는 거죠. 저자의 표현을 빌면 이렇습니다. “우울증은 사랑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는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는다." 사랑의 고통은 타인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사랑을 잃으면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벌거벗겨진 채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비참함과 무력감을 느낄 수 있고, 한때는 자신감과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었던 것이 이제는 상실과 상처의 근원이 된 것에 가슴 에이는 쓸쓸함을 느낄 수 있고, 상대방의 연락에 자신의 모든 미래가 달려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 하루 아침에 운명이 바뀐 것처럼 느낄 수 있고, 하루하루를 영원처럼 길게 느낄 수 있고, 내일 내가 제대로 살 수 있을까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하겠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실존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폭발적인 자기 해체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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