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아일랜드 바다를 건너 런던으로 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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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좆나 좋아.
앞에 앉은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컴컴한 영화관에서 혼자. 읊조리듯 터져나온 탄성입니다. 문득 어젯밤에 큰 딸애와 얘길 나누다가 오늘 아침 여덟시 조조 영화를 보기로 했어요. 좋은 영화일 거 같으니 둘째도 데리고 가자 합의를 했지요. 그렇게 토요일 밤에 처음으로 한시를 넘기지 않고 잠을 청했네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법원 앞에 대충 차를 대고 있는 지금, 날이 흐리고 선선하지만 시동을 끌 수가 없어요. 뜨거워진 마음보다 몸이 활활 타오르고 있거든요. 쎄게 틀어 논 에어컨이 아니었으면 당신에게로 달려가 추근댔을지도 몰라요. 스무살의 나처럼. 지금 이순간만큼은 될대로 되라 그러면서. 시동을 끄면 심장도 꺼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지금입니다. 일곱시 십오분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머리에 물도 발라보고 둘째와 첫째를 흔들어 깨워 나섭니다. 영문도 모르는 둘째는 연신 방긋 방긋해요. 아빠가 이렇게 깨우는 게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아빠 스타일 괜찮아? 이른 시간에 중년의 날 봐줄 누가 있겠냐만 그건 아니죠. 나를 위하고 아이들을 위한 질문 입니다. 내 스타일 괜찮냐니까? 엉. 뭐 아침 일찍 치고는 나쁘지 않네. 나도 긴바지 입을 걸 그랬나? 첫째의 심드렁한 대답도 뭐, 어때 아빤데 둘째의 짧은 대답도 금방 조용해 집니다. 차로 메가박스까지는 채 오분 거리도 안되거든요. 오리지널 팝콘과 콜라와 버터구이 오징어 몸통을 사들고 청소하는 아주머니와 인사를 하고 들어갑니다. F열 7,8,9 조조가 아니면 앉기 힘든 자리지요. 영화가 시작합니다. 오 마이 갇. 배경이 아일랜드네요. 어제 내가 그토록 먹고 싶던 아이리쉬 커피의 아일랜드입니다. 흠. 좀 더 바짝 당겨 앉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간은 뜨거운 여름 태양아래 소프트 콘처럼 뚝뚝 녹아 내리기 시작했어요. 내 안을 바닐라 향으로 가득채우는 시간이 흐릅니다. 아. 최고였어요. 어바웃타임 이후로. 내게. 최고였습니다. 원스나 내가 젤 좋아하는 키이라가 나왔던 비긴 어게인 보다도 더 더 더 좋았습니다. 훗. 성장영화구나, 잘되었네. 애들이 좋아하겠어. 사실 내 마음은 심드렁 이렇게 시작했어요. 하지만 바닐라 소프트콘이 점점 녹아 스미는 시간 속에서 벤자민 버튼처럼 내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난 어느새 늦은 사춘기에 몸부림치던 푸르고 비린 고딩어의 시절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서툼으로 반짝 반짝이는 노래들. 내게도 더 없이 이쁘기만한 모델 지망생의 그녀.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심장을 묶을 때쯤. 수영도 못하지만 바닷물에 뛰어든 그녀의 한 마디가 얼음 송곳에 찔린 심장처럼 얼어붙게 만들었어요. "해야하는 건 적당히 해서는 되질 않아." 잊고 있었지만 중용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현빈이 나왔던 역린의 중용 23장. 동서고금을 막론하고란 말을 이렇게 써먹어 보는군요. 고백하건데 적당히 했습니다. 요즘. 뭐 어때. 스트레스는 받지 말자 그러면서. 나의 청춘은 내 스스로 늙게 하고 있었던 게지요. 다시 영화에 집중합니다. 아일랜드의 아름다운 배경에 취할 쯤 영화는 점점 더 솔직해지고 날 것이 되어갑니다. 다 벗은 맨몸으로. 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네요. 여기 사람들은 우리네와 달리 감정을 다 표현해 냅니다. 이런 표현이 정말 좋아요. 산다는 건 날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내 생각과 같다고나 할까요. 솔직함이 들어나고 주저앉고 파괴되는 묘사는 누구든지 그를 그 답게 만듭니다. 부모는 부모답고 형은 형 다우며 동생은 동생답고 나는 나 답게 만들지요. 그리고 그런 날 것들이 기타로 드럼으로 피아노 속으로 들어가 노래가 됩니다. 음악이 됩니다. 사랑이 됩니다. 인생이 됩니다. 나는. 나이 든 나는. 청춘은 못되어도 열정이 됩니다. 다른 포인트 하나 더. 내게 이 영화는 여자로 시작해서 여자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더 좋구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라기보다. 여자로 시작해서 여자로 끝을 맺는다가 맞습니다. 여자는 시작이요 끝이며 순정이고 욕정이며 천국과 지옥이니까요. 그러나 또한 여자입니다. 더 없이 사랑스러운 여자입니다. 이 말이 마음에 가라앉을 때. 내게 사랑이란 말도 무겁지만은 않겠습니다.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에서 토니는 노래합니다. 무겁고 단단하게 큰 것일수록 떨어져 깨지기 쉽다고. 난 아니라 했지만. 투명한, 무겁고 단단한 틀로 마음에 울타리를 치고는 보라 내가 얼마나 유연하고 가벼운지를, 다 보이지 않느냐. 난 솔직하고 투명한 사람이다. 헛되고 가증스럽게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 이런. 커피가 다 식었네요. 그러나 여즉 뜨거운 내 마음을 달래기에는 더 없이 좋겠습니다. 오늘은 바람도 새소리도 가벼운 왈츠를 추는 나무도 내 뜨거운 열정보다는 못 해 보입니다. 이런 풍경이란 기억의 배경 그림 같아서 그 위에 마음을 그리기 좋을 뿐이네요. 아! 적당히란 말에는 당신과의 사랑도 들어갑니다. 당신과의 섹스도 적당히란 없을 겁니다. 네. 추호도 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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