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 자유게시판
이 글은 단상인지 음추인지 모를 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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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글쎄 조회수 : 3060 좋아요 : 1 클리핑 : 0




'양산과 부채'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정오.
놓치면 안되는 버스라 그늘도 마다하고 줄을 선다.
근래 먹은 더위에 물먹은 솜처럼 무기력해져 가방 속 부채를 꺼낼 기운마저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원망스럽건만 햇볕이 너무 강렬해 째려 보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땀만 줄줄.
갑자기 살짝 시원한 그늘이 머리 위로 드리운다.
뒤돌아 보니 양산을 들고 계신 중년의 여성분께서 양산 한 귀퉁이를 내쪽으로 내밀고 계셨다.

“날도 더운데 함께 쓰면 좋잖아요.”

여자는 올블랙이지를 외치며 한 여름에도 올블랙으로 즐겨입는 나는 그날도 올블랙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방부터 신발까지.
그런 내가 땀 뻘뻘 흘리며 녹아가는 버터 모양으로 서 있는 것이 안되어 보이셨던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하신다.

“감사합니다! 혼자 쓰셔도 되시는데.. 팔 아프시잖아요.”
“무게가 얼마나 된다고. 이런 날 햇빛 아래 그냥 서 있으면 쓰러져요.”

그 작은 배려, 마음 씀씀이가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부랴 부랴 가방에서 부채를 꺼내들어 열심히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부채질한다.
이번에는 내 팔이 아프지 않냐며 걱정하신다. 하핫. 이까짓거. 제가 보기엔 이래뵈도 힘이 좀 좋아요.
그렇게 오늘 처음 마주친 분과 두런 두런, 띄엄 띄엄 대화를 나눈다.

“우리 집은 17층이라 앞 뒤 창문 열어두면 맞바람쳐서 에어컨도 필요 없어요.
그래서 우리 딸은 밤에도 춥다고 이불을 덮고 자더라구요.”
“햇빛이 이렇게 강렬해도 건조하니까 그늘에 서 있으면 좀 괜찮더라구요.”
“그렇게 덥다 덥다 해도 입추 지나니 밤에는 확실히 덜 더워졌어요.”

아마도 내 또래의 딸을 가진,
그래서 땀 뻘뻘 흘리는 내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양산 든 손을 내미셨을,
낯선 아가씨가 시커멓게 차려입고 인상 팍팍 쓰고 있는 것이 성격 안 좋아 보였을 법도 하건만
그저 사람 좋은 미소로 스스럼 없이 말을 건네주시던,
그래서 내 자신을 위해서는 부채를 꺼낼 힘조차 없던 나로 하여금
아무 망설임 없이 부채를 꺼내 온 힘을 다해 부채질하게 만드셨던 길 위의 인연.

내게도 사랑은, 혹은 만남은 이런 것이었지 않나 싶다.
그저 무언가를 바래서가 아닌,
그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상대의 필요에 대해
사심 없이 내미는 양산 같은 작지만 따뜻한 배려.
그 작은 배려가 고마워 온 힘을 다해 부치던 부채 같은 작은 마음.
만나서 먹고, 마시고, 함께 살과 체액을 섞고, 땀과 체온을 나누고, 절정의 환희를 함께 하는,
순간 순간 묻어나는 그런 작은 것들.
난 그런 것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몇 번의 뜨거운 섹스를 나누어도 나에 대한 존중 혹은 배려가 없는 섹스는
아무리 오르가즘의 끝까지 가도 공허와 허무가 나를 덮쳤었고,
비록 오르가즘을 못 느꼈어도
나를 예쁘다 해주고, 괜찮은 사람이라 해주고 배려가 느껴지는 섹스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섹스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그런데 또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하고의 섹스는 어떠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반대로 반성도 된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긴 시간이 지나 한번쯤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서로가 되길 바랬는데...
길 위에 단 한 번 스치는 인연이더라도 작은 배려와 마음 씀씀이로 기억되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랑, 그런 섹스.
또 오려나...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소나기에 젖은 흙냄새, 이슬맞은 풀냄새가 어우러지는 이런 여름밤에는,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다.




 
Red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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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Pine 2018-08-10 11:19:42
키스자렛 연주할때 끙끙 거리는거 완전섹시한데.
Red글쎄/ 키스자렛 이즈 뭔들.. ㅎㅎ 느므느므 섹시하죠. 너무 좋아요. 꺄~
함덕/ 만성 변비라네요
SilverPine/ 진짜 싫다..... 재즈무지션한테 변비라니!!
함덕/ 재즈신에서 제 넘버원 피아니스트가 키스 형님이어요. 인간계를 초월 하신 분. 끙끙 거릴 때 신과 접신하는것 같음
Red글쎄/ 역시 키스 형님은 끙끙거림 하나로 모든 것을 평정하신... ㅎㅎ
LAWNJUSTICE 2018-08-10 06:27:27
올블랙ㅜㅜ 너무 더우셨겠어요
Red글쎄/ 생각보다 덥지는 않아요
LAWNJUSTICE/ 저는 시도조차 못하겠네요 ㅎㅎ
우주를줄께 2018-08-10 01:50:22
지금 이 순간에,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겐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Red글쎄/ 오 그런 분이 있으신가요? 부럽네요 ㅎㅎ
우주를줄께/ 없어요..ㅋ.ㅠ
르네 2018-08-10 01:25:13
잘 읽어습니다~~
Red글쎄/ 감사합니다!!
LAWNJUSTICE 2018-08-10 00:58:45
사람에 대한 배려가 중요한것 같네요
Red글쎄/ 어떤 인간 관계든 배려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LAWNJUSTICE/ 기본적인 예의죠 ㅎㅎ
LAWNJUSTICE 2018-08-10 00:56:30
멋진 글이네요
Red글쎄/ 감사합니다
halbard 2018-08-10 00:50:08
"내 모든 것들이 바로 너였다..." 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어요. 아마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해요. 아쉬움이나 후회도, 혹은 기쁨도 모두 서로에게 상대가 있음으로써 쌓은 추억들이고 그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인연들은 지금도 나의 부분으로서 나와 함께하는 것일 테죠. 여름에 좋은 인연을 만남이 부럽네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요.
Red글쎄/ 오호. 저도 저 말이 왠지 낯익네요. 그때의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죠.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구요. 하지만 그 속에서 과연 배려가 어떻게 작용했는가 요 근래 드는 생각들이에요. 그런 작은 마음 하나 차이로 다 다르게 기억되고 있거든요. 이 더운 날 길위에서의 작은 만남은 근래 힘들었던 저에게 작은 미소를 안겨주었어요. 기분 좋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
레몬파이 2018-08-10 00:32:55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나를 스쳐간 인연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저도 한 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Red글쎄/ 울림을 드렸다니 기쁩니다 :)
레몬파이/ 음악감상도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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