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단상인지 음추인지 모를 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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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과 부채'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정오. 놓치면 안되는 버스라 그늘도 마다하고 줄을 선다. 근래 먹은 더위에 물먹은 솜처럼 무기력해져 가방 속 부채를 꺼낼 기운마저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원망스럽건만 햇볕이 너무 강렬해 째려 보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땀만 줄줄. 갑자기 살짝 시원한 그늘이 머리 위로 드리운다. 뒤돌아 보니 양산을 들고 계신 중년의 여성분께서 양산 한 귀퉁이를 내쪽으로 내밀고 계셨다. “날도 더운데 함께 쓰면 좋잖아요.” 여자는 올블랙이지를 외치며 한 여름에도 올블랙으로 즐겨입는 나는 그날도 올블랙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방부터 신발까지. 그런 내가 땀 뻘뻘 흘리며 녹아가는 버터 모양으로 서 있는 것이 안되어 보이셨던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하신다. “감사합니다! 혼자 쓰셔도 되시는데.. 팔 아프시잖아요.” “무게가 얼마나 된다고. 이런 날 햇빛 아래 그냥 서 있으면 쓰러져요.” 그 작은 배려, 마음 씀씀이가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부랴 부랴 가방에서 부채를 꺼내들어 열심히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부채질한다. 이번에는 내 팔이 아프지 않냐며 걱정하신다. 하핫. 이까짓거. 제가 보기엔 이래뵈도 힘이 좀 좋아요. 그렇게 오늘 처음 마주친 분과 두런 두런, 띄엄 띄엄 대화를 나눈다. “우리 집은 17층이라 앞 뒤 창문 열어두면 맞바람쳐서 에어컨도 필요 없어요. 그래서 우리 딸은 밤에도 춥다고 이불을 덮고 자더라구요.” “햇빛이 이렇게 강렬해도 건조하니까 그늘에 서 있으면 좀 괜찮더라구요.” “그렇게 덥다 덥다 해도 입추 지나니 밤에는 확실히 덜 더워졌어요.” 아마도 내 또래의 딸을 가진, 그래서 땀 뻘뻘 흘리는 내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양산 든 손을 내미셨을, 낯선 아가씨가 시커멓게 차려입고 인상 팍팍 쓰고 있는 것이 성격 안 좋아 보였을 법도 하건만 그저 사람 좋은 미소로 스스럼 없이 말을 건네주시던, 그래서 내 자신을 위해서는 부채를 꺼낼 힘조차 없던 나로 하여금 아무 망설임 없이 부채를 꺼내 온 힘을 다해 부채질하게 만드셨던 길 위의 인연. 내게도 사랑은, 혹은 만남은 이런 것이었지 않나 싶다. 그저 무언가를 바래서가 아닌, 그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상대의 필요에 대해 사심 없이 내미는 양산 같은 작지만 따뜻한 배려. 그 작은 배려가 고마워 온 힘을 다해 부치던 부채 같은 작은 마음. 만나서 먹고, 마시고, 함께 살과 체액을 섞고, 땀과 체온을 나누고, 절정의 환희를 함께 하는, 순간 순간 묻어나는 그런 작은 것들. 난 그런 것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몇 번의 뜨거운 섹스를 나누어도 나에 대한 존중 혹은 배려가 없는 섹스는 아무리 오르가즘의 끝까지 가도 공허와 허무가 나를 덮쳤었고, 비록 오르가즘을 못 느꼈어도 나를 예쁘다 해주고, 괜찮은 사람이라 해주고 배려가 느껴지는 섹스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섹스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그런데 또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하고의 섹스는 어떠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반대로 반성도 된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는데, 긴 시간이 지나 한번쯤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서로가 되길 바랬는데... 길 위에 단 한 번 스치는 인연이더라도 작은 배려와 마음 씀씀이로 기억되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랑, 그런 섹스. 또 오려나...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소나기에 젖은 흙냄새, 이슬맞은 풀냄새가 어우러지는 이런 여름밤에는,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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