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바다에서 흘러가는 슬픔,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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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썸'을 타던 사람과 봤던 영화이다. 포스터에 나온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표를 예약했었다. 작은 영화관, 대부분이 커플이었다. 우리의 양옆은 다행히도 빈 좌석이었다. 그녀의 옆 모습, 팝콘을 먹는 손의 움직임, 다리의 위치 등을 신경 쓰느라 정작 영화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영화 내내 바라는 장면은 안 나왔고, 영화 말미 그녀가 눈물을 훔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그녀는 치켜세웠고, 나도 다른 의미에서 "맞아!"라고 맞장구를 쳤다. 영화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기억에 남았었다. 이번에는 희미해진 당시의 설렘을 뒤로한 체 영화에만 집중해 보았다. 2. 주인공 <리 챈들러>는 아파트 관리인(janitor)이다. 전구를 갈아주고, 쓰레기 처리를 하며, 막힌 변기를 뚫는 일을 한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지만, 때론 무뚝뚝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감정 표현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무표정으로 욕을 한다거나 펍(Pub)에서는 맥주를 마시다 자신을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이 폭발해 사람들과 주먹다짐을 한다. 3. 평화롭게 눈이 내리는 아침. 새롭지만 변함없이 시작된 하루. 리는 형 <조 챈들러>가 아프다는 전화를 받고 보스턴을 떠나 그가 살던 작은 마을 <맨체스터>로 향한다. 병원에 들어선 그는 형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소식을 전하는 친구는 울고, 소식을 듣는 리는 무덤덤해 보인다. 리에게 맨체스터는 무슨 의미일까? '고유명사 박명수'처럼 작은 마을 맨체스터에서 그는 고유명사 리 챈들러(the Lee Chandler)로 알려져 있다. 다시 돌아온 후 듣는 마을 소식에 대해 그가 무지하다는 것은 맨체스터에 대한 그의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준다. 4. 리는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guardian)이 된다. 과거, 리는 어린 패트릭과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나가 함께 낚시를 즐기기도 하고,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었던 추억이 있다. 리가 원래부터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맨체스터에서 사랑하는 아내 <랜디>와 세 자녀를 키우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그는 자녀를 잃고 만다. 그 후 아내는 리를 떠났고, 리는 맨체스터를 떠났었다. 그렇게 떠났던 맨체스터에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것이다. 리와 패트릭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조의 배를 팔려는 리, 배를 가지고 있길 원하는 패트릭, 맨체스터를 떠나고 싶어 하는 리, 맨체스터에 남고 싶은 패트릭. 지난날 서로를 돈독하게 했던 장난스러운 농담은, 어느새 서로를 비난하며 헐뜯는 농담이 돼버린다. 5. 리는 패트릭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본다. 아버지의 죽음 이 후 나름 차분해 보였던 패트릭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숨을 쉬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패트릭의 행동에 리는 어쩔 줄 모른다. 리는 패트릭이 잠들기까지 그의 침대 곁에 머문다. 그렇게 리는 패트릭에게 조금씩 양보 한다. 많은 문제를 일으키며 떠났던 패트릭의 엄마 엘리스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여자친구를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밤을 보내라고 하며, 배를 고쳐서 다시 타보자고 한다. 배를 고치고 배를 운전하는 패트릭의 모습을 보며, '지금'의 리는 처음으로 웃어본다. 6. 영화의 끝이 드라마틱한 행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두운 현실인 디스토피아(dystopia)를 그려낸다. 과거의 불행을 공유했던 사람들(리의 전 처 랜디, 조의 전 처 앨리스 등)은 이제 각자의 나은 삶을 살아내고 있지만, 리는 아직도 맨체스터의 삶을 버틸 수는 없다고 한다. 맨체스터는 영국의 맨체스터도 아니고, 미국의 대도시 맨체스터도 아닌, 시골의 작은 해안 도시이다. 그러기에 주변과 가까울 수밖에 없고, 유대감에서 오는 속박이 오히려 리를 과거에 가두고 만다. 7. 영화의 슬픔은 현실적인 슬픔이다. 극도로 슬픈 감정을 이상한 기분이라 설명하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패트릭처럼, 리에게 상처받는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죽으면 안 된다고 말하며 흐느끼는 랜디처럼, 그리고 가까스로 울음을 참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리처럼, 어렴풋이 현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떠오른다. 영화는 ‘누구나 힘들다고, 이겨내야 한다고, 끝까지 버티자고, 불행을 잊자’는 공허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례를 미뤄야 할 만큼 땅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매서웠던 겨울이 지나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봄이 맨체스터에 찾아온다. 잔잔하면서 때로는 거친 맨체스터의 바다처럼, 삶은 말없이 계속 흘러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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