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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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사랑일까? 논할 필요는 없다. 사랑의 본성이 그리움이자 동경이고 질투이자 탐욕이기 때문에 일부나 전부를 빼앗으려는 소유욕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 사랑을 의심하진 않는다. 다만 그 정도의 마음을 갖고 싶지도 그런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특정 부분이나 부위에 집착하는 –필리아(philia)나 BDSM의 지배나 속박에 해당하는 행위는 소유와 관련된 성적 욕구라 할 수 있지만, 이는 상대의 내면을 포함한 일거수일투족을 소유하려는 욕구와는 결을 달리한다. 식욕이 있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지 않고, 성욕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하고 섹스를 하지 않는 것처럼, 극한의 상황이 아니라면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욕구를 통제하는 법이다. 일시의 소유욕은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고 소유욕이 크더라도 통제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문제는 친밀감과 소유욕의 양면성에서 시작한다. 친밀감에 따라 기대가 커지고, 자기에게만 신경 쓰기를 바라며, 말하지 않아도 이해 받기를 원한다. 점차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달라고 강요하고, 집착이 지속하여 점점 광기로 변해가는 정도까지 나아가아 소유욕은 통제 범위에서 벗어난다. 광기의 소유가 멀리 있지 않다. 누구도 소유욕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남에게 대우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우해주라는 황금률에 따라 나는 기꺼이 그 욕구를 통제하려고 한다. 관계에서 느끼는 불안감, 두려움, 불신 등이 있다면 서로가 바라는 관계의 모양을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 해결을 못 한다면 결말을 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람은 소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도 설명한다. (저자는 소유욕을 병적인 집착이라 지적한다) 그는 소유로서의 사랑이 아닌 존재로서의 사랑을 권한다. 존재 자체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당신은 당신대로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이다. 그 자체도 다른 면의 조건을 요구하겠지만, 그나마 서로를 소유하려고 과한 행동을 하거나 통제 불가능한 감정으로 혼자 스트레스 받을 경우는 적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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