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속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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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쌍화점> '세자빈 봉시가 그녀의 몸종이었던 소쌍이와 석가이를 맷돌남편으로 두어 음행을 일삼았으니 폐서인했다.'
『세종실록』에 나오는 기록으로, 봉시는 폐서인이 된 뒤 집안으로부터 자결을 강요당하고 목을 메어 죽었다. 심약하고 학문에만 열중한 세자가 처소를 찾지 않아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동성애하면 오직 임금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했던 궁녀들을 생각하는데, 신라와 고려의 오아등 중에는 동성애자가 있었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동성애자는 신라 36대 왕인 혜공왕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왕은 여자같이 행동하고 옷 입기를 즐겨하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빌어 왕이 됐으니 나라에 불길하다고 하여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경덕왕의 적자로 8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을 했는데, 귀족 세력들의 싸움으로 혜공왕은 명목상의 왕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러한 분위기가 그의 여성화를 더욱 심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또한 몇몇 향가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 화랑들의 동성애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화랑의 '화(花)'는 꽃이나 여자의 이름에 쓰는 글자이며, '랑'도 여자에게 붙이는 글자이다. 따라서 의미대로 풀이한다면, '미소년'내지는 '꽃미남'으로 번역될 수 있다. '아름다운 남자들은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람하는데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는 데가 없었다.' 당시 화랑들이 얼마나 꽃미남이었던지 『화랑세기』에 보면 1대 위화랑을 '공의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고 표현했다. 따라서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화랑들은 자연스레 남색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화랑은 마복자라는 독특한 성풍속을 갖고 있었다. 서열이 낮은 화랑의 아내가 임신하면 서열이 높은 화랑과 동침을 하게 되는데, 이때 낳은 아이가 마복자였고, 서열이 높은 화랑은 이 마복자의 양아버지처럼 사회적 위치를 보증해주는 풍습이다. 한편, 고려 공민왕도 동성애자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귀족 미남 청년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고 평소 여자옷을 입고 치장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공민왕은 원나라 출신의 아내인 노국 공주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제위라는 관청을 만들어 미소년을 모아 그들과 동성애를 즐겼다. 중국의 절대 영향을 받고 있던 터라, 공민왕은 다른 여자를 탐할 수 없기에 동성애에 빠져들었던 것은 아닐까. 이처럼 고려시대까지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처벌도 없었다. 그러나 유교국가였던 조선시대의 동성애는 죄악시되어 일반 성범죄 처벌기준보다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동성애는 죄질의 경중에 따라 태형(10-60대), 장형(70-100대), 도형(징역형), 유형(유배지형), 사형(교수형, 참수형)까지 가능해다. 동성애자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부분은 성적 변태자로 보는 시각과 에이즈의 원인이라고 매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편견은 커밍아웃을 감행한 동성애자들이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생존권마저 위협받는 결과로 나타나 더욱 문제시되고 있다. 아직까지 동성애의 원인은 규정되지 않았다. 일부 연구 결과로 유전자의 차이, 호르몬의 차이, 뇌 구조의 차이 등 생물학적 원인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많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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