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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사상과 도교의 논리에 기반한 축첩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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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우동] 젊은 여성들이 돈 때문에 첩이 되는 ‘얼나이(두 번째 가슴이라는 뜻으로 첩을 말함)’ 문화의 확산으로 중국 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불륜을 막아주는 ‘내연녀 퇴치 전문가’까지 등장했으며, 일부 대학에서는 기혼자와 ‘특수관계’를 맺어 가정을 파탄 내는 학생들을 제적시키는 등 엄벌에 처하고 있다. 하지만 얼나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을 ‘커밍아웃’ 하고 있으며, 얼나이들끼리의 모임까지 생겨났다. ‘첩 문화’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역시 과거에는 축첩이 빈번해 ‘붉은 건 대추, 대추는 달다. 달면 엿이요, 엿은 붙는다. 붙으면 첩이다’라는 민요까지 불려졌다. 율곡 이이를 가르치기도 한 조선초기의 석학 어숙번조차 《패관잡기》에서 우리나라의 운수가 남자 셋에 여자 여덟의 비율인 ‘천삼지팔(天三地八)’이기 때문에 한 남자가 두세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살아야만 조화가 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어숙번의 논리는 음양사상에서 기인한다. 양(陽)인 남자는 홀수이기에 한 명, 음(陰)인 여자는 짝수이기에 둘이 만나 함께 살아야 기(氣)를 얻어 평안하고, 법치국가가 된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 중국의 천자는 왕후 1명, 부인 3명, 빈 9명, 세부 27명, 어첩 71명 등 111명을 두었고, 제후는 아홉, 경대부는 셋, 선비는 둘을 취하는 것이 법도(?)였다. 또한 성(性)을 통한 건강법을 지향한 도교의 영향도 한몫을 했다. 도교는 ‘한 남자가 하룻밤에 열 명의 여자와 동침하며 기를 취하면 불로장생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별실’이나 ‘측실’로 불린 첩은 운명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는데, 남편의 권세를 업은 경우 권첩(權妾)이라 했다. 영의정 김재근의 첩은 나주의 기생 출신으로 베갯머리 송사로 남편을 쥐고 흔들었기에 벼슬자리를 얻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래서 나주와 대신의 존칭인 합하를 합쳐 ‘나합(羅閤)’이란 별명으로 통했다. 이와 반대로 남편의 벼슬을 위해 몸을 파는 경우에는 ‘절첩(節妾)’이라고 불렀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이 금의환향하는 길에 얻는 ‘객첩(客妾)’도 있었다. 등과의 영예를 나누어 갖고 싶은 집주인이 급제자에게 자신의 딸을 수청 들게 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바로 ‘습첩(拾妾)’이다. 소박맞은 여성들이 친정에서도 눈치가 보이면 새벽녘에 머리 풀고 봇짐을 들고 성황당 밖에 서 있다가 처음 만나는 남자를 따라가는 풍속에서 비롯되었다. 습첩만큼 비참한 것은 ‘헌첩(獻妾)’이다. 송사가 걸렸거나 죄를 지어 형을 받았을 때, 형을 면해 달라고 관원에게 딸을 첩으로 바친 것이다. 첩 문화가 뿌리 깊었던 중국에서는 시집갈 때 여동생이나 조카를 잉첩(?妾, 시녀)으로 데려가는 풍습도 있었다. 심하면 10여 명의 잉첩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에 남편보다 골품이 낮은 부인을 잉첩이라 했으며, 조선시대 때는 세자비의 간택 때 함께 뽑은 세자의 후궁을 잉첩이라 했다. 또한 고대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부득이하게 얻는 후처를 잉첩이라고 했다. ㅣ사랑 쟁탈전으로 발달한 화장술과 패션 누구나 첩을 두면서 정부인과 여러 명의 첩이 벌인 사랑 쟁탈전이 극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서양에서는 화장술과 패션의 발달을 가져왔고, 동양에서는 무술(巫術)의 번성으로 나타났다. 위로는 만백성의 어머니인 왕비에서 비천한 여종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궁중에서는 최음제를 주로 사용했다. 후각을 미혹(迷惑)시키는 사향주머니는 상시 패용하는 최음용 방향제였다. 갖가지 비방으로 만든 최음제를 몸에 좋은 정력제라고 속여 임금이 처소를 찾으면 마시게 했다. 최음제를 마신 임금은 유별난 성행위를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임금이 자주 찾아 배태할 가능성이 높기에 사용했다. 민간에서 널리 쓰인 것은 무술로 《혼인술비법(婚人術秘法)》이란 책에 여러 방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남편의 엄지손톱을 태워 재를 내어 술에 타 마시고, 맨발을 남편의 배꼽에 놓고 쓸어주면 남편의 사랑을 얻게 된다’고 쓰여 있다. 이밖에 부부간 금슬을 높여준다는 ‘화합주(和合酒)’, 짝사랑하는 여성을 위한 ‘엽가신부적(獵哥神附符籍)’과 같은 부적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처첩 간의 갈등은 물론이고 첩이 낳은 서얼들의 불행으로 ‘세상살이 첩살이처럼 곤고한 것이 없다’는 속담을 만들어냈다. 젊고 싱싱한 몸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는 정실부인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지만 이내 나이가 들어 늙거나 사내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면 내쳐지는 신세가 되었으며, 시시때때로 본처의 학대를 감내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장대굿’이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첩을 시기한 본처가 남몰래 집에 불을 지르고 도깨비불이 첩의 몸에 들어갔다며 무당을 불러 굿을 벌인다. 이때 무당은 첩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장대로 사타구니와 하복부를 매질했다. 한편 ‘공자님도 첩을 두었다’며 축첩을 당연시하던 조선사회에도 애처가들이 적지 않았는데, 정조 때 학자 심노숭이 대표적이다. 그가 아내를 잃은 ‘고분지통(鼓盆之痛)’의 슬픔 속에 남긴 작품 중 ‘오늘 우연히 제수씨가 차려준 상위에 / 부드러운 쑥이 놓여 있기에 문득 목이 메이네. / 그때 나를 위해 쑥 캐주던 이 / 그 얼굴 위로 흙이 도톰히 덮이고 거기 쑥이 돋아났다네’라는 시가 있다. 줄곧 포의(布衣)로 지내다가 50대 중반에야 천안군수 등을 역임한 그는 아내를 애도하는 작품을 쏟아냈다. 그가 성취한 산문 중에서 뛰어난 것이 바로 이때 남긴 ‘도망문(悼亡文)’들이다. 그는 무려 26제의 시와 23편의 글을 남겨 아내를 애도했는데, 우리 문학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다. ㅣ축첩이 부와 권력의 상징 되기도 서양 역시 축첩 문화가 보편적이었는데, 몽테뉴가 쓴 《수상록》에는 ‘남자들은 한 명 이상의 부인을 거느리는데, 부인의 수는 남자들의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부인들은 남편이 다른 여자의 애정과 우정을 받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는데, 정말 특이한 일이다. 이는 남편의 매력이 명성을 대변해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근세까지 남성의 축첩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아내와 후처들이 남편의 외도를 적극 권장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른 여성에게 유혹을 받는 정도가 남편의 능력과 명성이기 때문이었다. 축첩은 종교계로도 번졌는데, 13세기 탁발수도회는 ‘수녀가 순결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몸이 타오르면 속인에게 몸을 맡기는 것보다 성직자에게 정조를 허락하는 것이 훨씬 죄가 가볍다’며 음란을 부추겼다. 이런 연유로 15세기의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성직자에게 축첩세를 거둘 정도였다. 축첩이 가장 발달한 곳은 이슬람문화권이다. 마호메트가 《코란》에서 계시한 내용에는 일부다처제에 대한 가르침이 무수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 원칙은 종족 번영이었다. 그래서 본처를 4명까지 두는 것이 허용되었고 ‘오른 손의 소유가 되는 것(여자 노예나 이교도의 미망인)’은 몇 명이라도 무관했다. 그러나 본처 4명에게는 반드시 균등하게 재산을 나누어주어야 했으며, ‘아내들에게는 공평하게 접하며 그중 한 사람이라도 공중에 매달아놓듯이 버려두면 안 된다’는 가르침에 충실했다. 축첩의 역사를 교훈 삼아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주는 행복과 편안함을 다시금 일깨워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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