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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을우동 뺨친 조선시대 프리섹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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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우동] 인류의 역사를 뒤바꾸는 비극인 전쟁은 성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것이 베트남전으로 촉발된 프리섹스 풍조다. ‘청교도’적 건국이념에 따라 엄숙한 도덕주의가 지배하던 미국이 프리섹스의 진앙지가 된 것은 반전(反戰) 여론 확산과 함께 히피(hippie)와 여성해방(Woman lib)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비롯되었다. ‘Love & peace’를 지향하는 전미여성동맹이 성차별 반대와 낙태의 자유를 주도했는데, 자연스레 대학가에서부터 서서히 프리섹스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피임약이 출시되어 섹스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즐기는 놀이’로 변화하게 되었다. 피임약으로 임신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전장에 나가는 애인에게 아낌없이 몸을 허락했고, 급기야 스와핑 풍조까지 생겨났다. 세계의 경찰국가이자, 경제대국인 미국의 성문화는 이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가장 끔찍스러운 전쟁이 역설적으로 ‘쾌락문화’를 탄생시킨 것인데, 프리섹스는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이 양성평등 사회로 바뀌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단순한 성의 유희로만 볼 수 없는데, 인류 역사에는 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관습의 굴레에 맞서 육체적 해방을 추구했다. 우리 역사에서 돋보이는 프리섹스의 상징은 유감동, 어을우동, 이씨 부인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유감동과 어을우동의 이야기는 영화 등으로 제작되어 익히 알려있으므로 이씨 부인의 일화를 소개한다. 조선 건국 초기에 벌어진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영양군’에 책봉된 이응은 예조와 병조판서를 지낸 조선 초의 문신이다. 척불(斥佛) 정책에 앞장선 대표적인 유교사상가였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손녀는 자유부인이었다. 이씨 부인은 단양군사 남의와 혼례를 올렸으나, 남편의 외모가 볼품 없어 부부의 정을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남편이 병들어 일찍 죽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어 외롭게 독수공방 하게 되었는데, 끓어오르는 정염을 억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을에 혼자 살고있는 노파의 집을 빌려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더는 남의 눈을 피할 수 없자 친정어머니를 졸라 재가를 하였다. 과부의 재가(再嫁)를 금지하는 당시 풍속으로 볼 때, 친정어머니는 도저히 내키지 않았지만 딸의 뜨거운 몸을 익히 아는지라 할 수 없이 중매쟁이를 불렀다. 그리고 활 잘 쏘기로 이름난 무관 유관과 혼례를 치러주었다. 두 사람 모두 활달한 성격이라 죽이 잘 맞았는데, 결혼한 지 10 여년이 지나자 자식이 10명이나 되었다. 해서 유관의 동료들은 ‘자네 부인의 배는 꺼질 줄 모르는군.’하며 비아냥거렸는데, 유관은 ‘부부가 금실이 좋은 것이 무슨 흉이란 말인가’라고 받아 넘겼다. 그러나 건강하던 유관도 병을 얻어 죽자 그녀는 또 다시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내게 되었는데, 주위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여러 남자를 만나 꿋꿋하게 자유부인다운 일탈행위를 일삼았다고 한다. 재혼을 금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재가한 여성이 낳은 자식들의 벼슬길을 봉쇄했던 유교사회에서 자유로운 성을 갈구했던 그녀는 어우동과 더불어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인물로 평가할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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