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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교사였던 하녀들의 별명은 ‘가문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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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가 유럽에 금속활자를 보급하자 베네치아의 약삭빠른 상인들은 인기있는 매춘부의 이름과 주소, 취향, 서비스 내용, 가격을 적은 리스트를 제작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당시 베네치아에는 관청에 알려진 매춘부만 1만 1600명에 이르렀기에 고객의 입장에서는 누가 어떻게 봉사해 주는지, 가격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쇄술의 발달은 섹스산업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매춘부들은 자신의 누드 사진을 엽서로 제작해 판매했으며, 춘화집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문화학자들이 인구의 20%가 매춘부였다고 비판할 정도로 중세유럽의 대도시는 매춘부들로 몸살을 앓았는데, 매춘부들은 휘파람과 알몸으로 고객을 유혹했다. 떼를 지어 거리를 활보하며 다짜고짜 지나가는 남성들의 팔짱을 끼고 유곽으로 유인했으며, 침실의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알몸으로 샤워를 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해서 건실한 남자들은 아예 뒷골목을 피해 갈 정도였는데, 마침내 당국은 포주들에게 고용하고 있는 윤락녀들이 윤락녀의 옷차림 그대로 뒷골목을 멋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금족(禁足)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매춘부들은 교회 같은 곳을 가려고 외출할 때에는 외투와 베일을 착용해야 했으며, 일반 여성들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복장의 착용으로 점차 규제가 강화됐다. 1554년 당국의 차별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도시의 매춘부들이 모두 이열종대로 거리 행진을 벌였지만 군대까지 동원해 전부 연행하겠다고 강경하게 맞서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는데, 당국의 규제보다 매춘부들을 괴롭힌 것은 이른바 ‘은근짜’와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의 목장에는 먹이가 점점 줄어가네. 변두리 여자들과 하녀까지도 날마다 그들의 목장을 망치기 때문이지’라는 어느 풍속시인의 작품처럼, 윤락녀들은 까다로운 규제로 인한 고통과 더불어 허가를 받지 않고 간헐적으로 매춘영업을 하는 ‘은근짜’나 ‘하녀’들의 위협을 받았다. 고객들도 성병의 위험이나 직업여성들의 능숙한 기교에 주눅이 들어 ‘은근짜’나 ‘하녀’들을 선호했기에 마침내 매춘부의 실력 행사가 벌어졌다. 매춘부들은 시청으로 몰려가 ‘은근짜’들이 모여 있는 소굴에서는 뚜쟁이 여자가 이 방에는 유부남을, 저 방에는 젊은이를 주야를 가리지 않고 끌어들여 매춘을 행하고 있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또 시장에게 ‘은근짜’ 소굴을 때려부수고 싶으니 허가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래서 시장의 허가를 받은 윤락녀들이 몰려가 문을 부수고 난로를 뒤집고 유리창을 깨뜨렸으며, 방에 있는 집기들을 길거리에 내동댕이치며 분풀이를 했다. 매춘부들의 기습에 놀란 ‘은근짜’와 남자 손님들은 거의 알몸으로 황급히 피했기에 오랜 세월 진풍경으로 ‘회자’됐다. 매춘부들의 실력 행사와 당국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은 불법 매춘은 하녀들의 성매매였다. 하녀들은 낮에는 정숙한 복장으로 집안일에 매달렸지만, 밤이 되면 요부로 변해 밤거리를 활보했다. 그녀들은 주인집 자제나 그들의 친구, 또는 상전과 친교가 있는 유력 인사들과 만나 몸을 팔았는데, 얼굴이 반반한 하녀들은 상전의 요청으로 사춘기를 지나 성에 눈을 떠야 하는 자제들을 상대로 실전 성교육을 펼치고 보너스를 받아 챙기기도 했다. 해서 하녀들 중에는 집안 남자 모두와 폭넓게 관계를 맺고, 오래도록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하녀를 ‘가문의 우물’이라고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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