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8시,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들어오면 오나보다~’하는 평소와는 다르게 집에 빨리 들어와보라는 메시지였다. ‘뭐지?’하고 10시쯤 집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는 앞장서서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더니 말했다.
“너 이게 뭐야? 이게 왜 니 서랍에 있니?”
뭔가하고 보니 다름 아닌 콘돔이었다. 레드홀릭스 글쟁이 파티에 갔다가 부르르닷컴으로부터 선물 받은 (포장박스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콘돔이었다. 몇 개 쓰고 나서 남은 걸 내 책상서랍 구석에 넣어 뒀던 기억이 났다.
근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콘돔박스에는 귀여운 캐릭터가 베시시- 웃고 있는데 우리 엄마는 캐릭터와 상반되는, 진지한 얼굴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대답을 듣고 싶다기보다는 꾸중을 하려는 거였겠지.)
나는 웃겨서 킥킥대고 웃으며 대답했다.
“콘돔이지, 뭐야?”
“니가 이걸 왜 가지고 있니? 남자애도 아니고.”하고 우리 엄마는 아직도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나는 어이가 없어 쏘아 붙이게 되었다.
“콘돔을 왜 가지고 있냐니? 내 나이가 몇 갠데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지. 콘돔은 남자만 가지고 있어야 돼? 내가 가지고 다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 동생(올해 23살)이나 나(올해 24살)한테 직접 챙겨주지는 못할 망정.”
“너 그러면 결혼할 애도 아닌데 아무하고나 막 자고 다니니?????”하고 우리엄마는 성내며 물었다.
나는 더 어이가 없어서 침대에 쓰러지며 말했다.
“아유~ 지금 내 방에서 콘돔이 나온 거에서 내가 막 자고 다니는 상상까지 간 거야??? (여기서 ‘섹스는 꼭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해야 되는 건 아니다’는 내 생각을 말하기엔 엄마에게 너무 큰 충격이 될 것 같아 그 쪽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할 애하고만 자야한다는 듯한 엄마의 의견 쪽으로 포인트를 돌렸다.) 이것만 보고 내가 누구랑 콘돔을 썼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럼 결혼할 애하고만 자야 된다는 거야?”
여기까지 하자 엄마도 아무 말없이 내 방을 나가버렸다.
(엄마도 결혼한 아빠하고만 자보진 않았겠지. 아빠도 마찬가지고.)
나는 아까 내방 침대에 누운 그대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엄마 딸은 지금 섹스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고, 야한 감성의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19금 팟캐스트 녹음에, 녹화에 등등 이 쪽으로 뭘 많이 하고 다니는데, 기껏 콘돔에 기겁해서 심각하게 얘기하는 엄마한테 내가 하고 다니는 이런 것들을 다 얘기할 수 있을까?’
절대 없을 것 같다.
물론 엄마아빠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떤 늑대 같은 애가 우리 딸이랑 자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거 아닐까, 우리 딸이 어디서 몹쓸 짓 당하진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겠지.
하지만 엄마, 아빠가 30년 전에 그랬듯이, 엄마 아빠도 알다시피, 우리는 결혼할 사람하고만 섹스를 하진 않는다.(하진 않는다? 할 수는 없다?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암튼 대부분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결혼 전까지 원치 않는 생명의 잉태 없이, 사랑하는 사람(꼭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과 섹스를 즐겨야 하는데. 이에 가장 확실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콘돔이다. 그 콘돔을 이미 성인인 자녀가 가지고 있다고 얼굴 붉히며 꾸중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오히려 가지고 있지 않은지 묻고, 없다면 그때 꾸중하며 챙겨줘야 되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첫 술은 부모님께 배워라’라는 말이 있듯이 ‘첫 콘돔은 부모님께 배워라’라는 말도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첫 사용 전까지 콘돔을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했었다. 사용법도 물론 몰랐다. 교과서 어느 부분에서나 1년에 1번은 꼭 있는 성교육 시간에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 3때까지 12년 동안의 어떤 선생님도, 콘돔의 사용법을 직접 알려준 적은 없었다.
나는 20살 때 남자친구가 직접 알려줘서? 알게 되었고, 그 남자친구도 분명 지 친구나 다른 곳에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첫 콘돔은 부모님이 사주시고, 사주시면서 사용법까지 상세히 알려주고, 안전한 섹스에 대한 중요성까지 제대로 가르쳐 주는 것이 맞아도 백번천번 맞다.
이번에 첫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같이 영화 보러가는 것도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 부끄러워하는 내 막내 동생(중학교 1학년, 14살)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그 날, 나는 잘빠지고 제일 얇은 콘돔을 막둥이에게 사주고, 그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여자친구와 꼭 안전하게 섹스하라고 말해줘야겠다. (아직 여자친구와 섹스를 권장?하기에 중1인 우리 막둥이는 너무 애인 것 같다.)
레드홀릭스의 슬로건(섹스는 부끄럽고 감춰져야 될 것이 아니다)이 널리 퍼지는 그날, 혹시나 우리는 부모님께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엄마 아빠, 콘돔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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