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모 온라인 서점에 '19+' 카테고리가 따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인 만화나 소설이 주류일 거라는 생각과 달리, 섹스 테크닉에 대한 조언이 담긴 실용서가 많았다. 오! 신세계를 발견한 것 같았다.
기쁨도 그것도 잠시 이내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얼마나 타당한 내용들이 쓰여 있을까. 가령 내 애인이 이런 책을 사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그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이게 무슨 낭비지? 하는 생각.
과연 책을 읽고 내 남자의 테크닉이 일취월장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잘못된 지식을 심어줘서 더 망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섹스를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의심 안 가질 수가 없다. 지금이야. 내가 나서야 할 순간. 주저없이 내가 내가 직접 읽어보기로 했다. 수많은 책 중에서 가장 직관적인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섹스북>
권터 아멘트 지음, 이용숙 옮김, 박영률출판사
제목이 <섹스북>이다.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아마 다들 제목은 들어봤을 책이다. 1995년 우리나라에 처음 출간 돼 지금까지도 판매되고 있는 걸 보면 섹스에 관심 있다 하시는 분들은 한번쯤 들춰봤을 법한. 나는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렇다. 이 책은 더 팔리고 더 많이 읽혀야 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던 1995년을 한 번 생각해보자. 그때는 '섹스'라는 말이 금기였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청소년 교육서인 이 책이, 이미지가 대거 삭제된 데다가 '19금' 딱지까지 붙어 나왔다. 요즘은 일반 잡지 표지에도 섹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걸 보면 우리 문화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섹스북>은 가히 섹스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룬다. 자위부터 시작해서 성교육, 피임, 낙태, 동성애, 에이즈, 사랑, 결혼 등등. 섹스 자체뿐 아니라 섹스와 관련된 모든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 책 한권 읽는다고 섹스 기술이 월등히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 있게 한 마디는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남자라면, 그리고 작가의 취지를 잘 이해한 남자라면, 여자들에게 멋진 남자, 괜찮은 남자라는 평 정도는 들을 수 있다.
이 책은 섹스에 대해 무척 진보적인 자세를 취한다. 청소년에게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섹스 하면 안 돼!'하고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부모들, 어른들의 심리가 어떤 건지에 대해 말한다. 낙태에 대해서는 '생명의 소중함'보다는 자기 몸과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측면에서 다룬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취하는데, 결혼과 자애로운 부모님과 사랑 받는 행복한 자녀들이라는 가정이라는 환상이 얼마나 허멍한 것인지를 꼬집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꽤나 불편한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목차가 있어 읽기 싫은 부분, 재미없는 부분은 건너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 다음 화제로 넘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꾹 참고 읽어야 한다.
참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이 책은 참고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섹스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섹스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자신의 생각에 대해 점검해 볼 시간을 던져주는 책이다. 이미 테크닉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섹스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를 되돌아보고 만나는 상대 족족 몸만이 아닌 심리적인 만족까지 줄 수 있는 진정한 선수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며, 이제 막 섹스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섹스에 임하는 자세를, 커플에게는 섹스와 사랑, 결혼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에 눈뜨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줄 것이다.
물론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 이 책의 개정판이 새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특정 부분, 특히 포르노그라피, 섹스에 관련된 매체에 대한 부분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있다. 또한 노골적인 포르노는 너무 적나라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보지 않는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설마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유난히 직접적인 묘사가 있는 야동을 즐기는 걸까?)
번역도 그다지 매끄러운 편은 아니다. 남성이 여성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해주는 것에 대해서 '커닐링구스라'가 아니라 '펠라치오'라고 표현을 한다던가, '이반'이라던가 '게이'라는 표현이 꽤 통용되고 있음에도 남성 동성애자를 '호모'라고 지칭한다던가, '호모 섹슈얼'이라는 단어를 '동성연애자'로 번역하고 있는 부분, 그리고 피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우리나라에서 주로 쓰고 있는 '루프'라는 단어 대신 '일반 페서리'라고 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군데군데 거슬리는 곳이 눈에 띈다. 독일의 개정판 출판 여부를 떠나 우리나라의 특성과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번역 개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책을 추천을 해도 어차피 안 보는 사람은 안 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인용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부분이다.
이제 책임의 문제를 이야기합시다. 상대방에 대해 또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말은, 두 사람의 성행위의 결과로 생기는 일에 대해 함께 책임을 진다는 뜻이며 그에 대한 예방조치에 함께 신경을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소망이나 욕구를 배려하는 일도 이 '책임'에 포함됩니다. 이 말은, 두 사람 모두가 진정으로 성행위를 원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이 행위에 대해 정말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내가 욕구를 느낀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그에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거나 위협을 하거나 치사한 속임수를 써서 상대방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결코 책임 있는 행동이 못됩니다. (중략)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 '다른 애들'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남들이 어떻게 하든, 성적인 관계는 당사자 두 사람만이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의견 일치를 봐도 두 사람이 보는 것이고 뜻이 안 맞아 싸운다 해도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이지 '다른 애들'이 모범을 보일 일이 아닌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한 번 얘기해 보십시오. 어떤 압력이나 술수도 없이 두 사람이 진정한 합의에 도달해 건강한 성행위를 하는 것이, 그리고 충분한 예비 지식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두려움 없이 성행위를 하는 것이 몇 살 때쯤부터 가능할지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전제조건을 다 갖추는 것은 몇 살 때부터일까요? 나는 전혀 그 나이를 얘기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어떤 경우엔 열네 살에도 이처럼 성숙한 태도를 지니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서른 살에도 이러한 전제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글쎄요, 한 여성이나 한 남성을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한 사람의 파트너로서 인정할 능력이 없는 그런 서른 살짜리에겐 성행위를 금지시켜야 할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본문 72-76쪽
글쓴이ㅣ팍시러브 핑크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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