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 여성학, 페미니스트 같은 단어에 알러지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꽤나 많다. 알러지 정도면 다행이지만 거의 발작을 하거나 위 단어 중 하나만 튀어나오면 알 수 없는 적개심과 분노를 드러내고 큰 소리부터 치는 사람도 많다. 페미니즘은 등 따시고 배부른 뇬 들이 살 만 하고 할 일 없어서 해대는 헛소리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물론 이곳, 팍시러브 회원들 중에도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이때까지와는 다른 성문화를 한 번 가꿔보자, 라는 사이트에서도 이러니 성 해방이 여성의 지위 향상과는 상관없다, 결국은 남성들로 하여금 좀 더 섹스를 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일부 페미니스트의 주장도 수긍할 만 하다.
어쨌든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책은 뭐라고 포장을 하든 결국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베티 도슨은 과격한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고, 이 책 초반은 남성의 억압이니 하는 남자들이 가장 짜증낼 만한 말도 들어있다. 그렇다고 절대 읽지 않을 책 리스트에 올려두는 건 한 번 고려를 해 볼 필요가 있다.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남성들이 어떻게 섹스를 할 때 여자를 만족 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해답도 담고 있으니까.
자위는 혼자 하는 섹스다.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
(베티 도슨 글, 곽라분이 옮김, 현실문화연구 발행)
솔직히 말하면 난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앞에 소개한 <섹스북>이 훨씬 두꺼움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만에 읽어 치운 것에 비한다면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 <섹스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대화하는 인물들의 경험담은 남의 이야기 읽듯 가볍게 느껴졌고,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 현재의 성문화의 문제점 같은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면 되었다.
그에 비하면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는 철저하게 베티 도슨 자신의 경험을 베이스로 한다. 어릴 적부터의 자위 행위, 그리고 어렴풋이만 가졌던 애매 모호한 낭만적 섹스에 대한 환상, 결혼과 결혼 생활, 이혼, 그리고 그 이후의 성생활을 되돌아보며 털어놓는데 그녀가 자위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그 부분까지는 일반적인 여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가벼운 음담패설이나 우리 사회 성문화는 이래서 문제야, 같은 이야기는 쉽지만 난 사실 섹스를 하면서 한 번도 즐거운 적 없었어, 남편이랑 혹은 남친이랑 섹스 같은 건 진짜 하고 싶지 않아,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 없는데 나 불감증 아닌가, 하는 이야기는 마냥 꿀꿀하고 피하고 싶은 이야기 아닌가.
초반에 이 책을 읽기가 힘들었던 건 아마 이런 탓이 아니었나 싶다.
베티도슨 betty dodson
이 책은 어찌 보면 베티도슨의 섹스 자서전과도 같다. 책의 많은 부분을 저자 자신이 섹스에 이런 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했다, 거기서 얻은 깨달음을 자신의 예술로 표현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섹스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재정립하고, 주변의 많은 여성들과 나누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다, 는 것을 기술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베티 도슨이 자신의 경험과 주변 여성들과 나눈 여러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된 섹스 관의 핵심은 '자위'이다. 자위를 해방시켜야 섹스도 해방이 된다는 것이다. 남녀 모두를 통틀어. 그 동안 자위는 섹스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자위란 섹스 할 상대가 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존재해왔다. 아니, 그 전에 굳이 프로이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성의 '자위'는 그 존재 자체가 부정당해 왔다.(자위하는 여자가 있냐, 는 질문을 하는 남자와 여자를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다.)
남자들에게 있어 자위는 섹스 할 상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는 처량 맞은 행위였고, 여자들에게 있어 자위는 음탕한 여자나 하는 그런 행위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남녀 공히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아끼고 즐기는 행위로서 자위를 즐기고 파트너 섹스에도 끌어들이면 성생활이 훨씬 스무스하게 풀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베티 도슨이 자위를 주장하면서 또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자기애'이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섹스에서도 솔직하고 당당할 수 있고, 솔직하고 당당해야 오르가즘에 오르는 장벽을 걷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의 가장 첫 단계 중 하나가 자신의 성기를 긍정하는 것이다. 남성들에게도 여성들에게도 크기나 모양에 상관없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개성적인 자신만의 성기에 자신을 가지라는 말을 한다.
또한 오르가즘에 대한 환상도 걷어내고 자신이 느끼는 오르가즘을 오르가즘으로 긍정하라는 말을 한다. 남성들은 과장된 신음 소리를 마구 내며 연기를 하는 포르노 배우 때문에, 여성들은 로맨스 소설 같은 데서 나오는 파도가 밀려온다는 식의 오르가즘 묘사 때문에 오르가즘에 대해 과장된 환상을 가지고 있고, 실제 오르가즘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오르가즘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저 몸이 찌릿찌릿 하는 작은 떨림부터 정말로 정신이 아득해지고 죽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까지 모두 오르가즘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로 자신의 오르가즘을 부정하지 말라는 말도 한다.
베티 도슨이 한 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디 섹스 워크숍'이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위며 섹스에 대해 가르치는 것인데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위 방법이나 자위 용품에 대해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앞에서 자위를 해 보여 주고, 다 같이 자위를 해보고 자신이 느낀 오르가즘에 대해 말을 하는, 정말 몸으로 하는 강습이었다.
여자 그룹뿐만이 아니라 남자 그룹도 했다고 하는데 특히 남성 바디 워크숍을 통해 베티 도슨은 남자들 또한 얼마나 억압 받고 있는가를 깨달았다고 한다.
나는 남자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남성적인 외양 뒤에 놀랄 만한 새로운 모습이 감춰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성들은 집을 나가 젊은 여자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으니 여성들처럼 성적으로 의존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중략) 한번은 공처가로 놀림 받는 남성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부인의 끊임없는 간섭과 통제로 인해 매맞는 아내와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다만 남성들은 체면 때문에 이런 얘기를 남에게 하지 않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성적 역할과 사회화 과정에서의 차이 때문에 남성과 여성은 좀처럼 서로의 유사성을 보지 못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혹성에서 온 존재라고 간단히 말해 버리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진정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중략) 여자들은 성적으로 너무 경직되어 있어 남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고 있다. 서로에게 보다 많은 연민과 동정심을 보여야만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있어 온 오랜 간극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성적인 경험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다양한 경험을 가능케 해 주며 그러는 편이 보다 에로틱하다'는 것에 잠정적으로나마 동의하도록 하자. (p. 147-148)
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라면 한 번 읽어볼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책 속에 묘사된 바디 섹스 워크숍의 장면들, 혹은 베티도슨이 경험한 여러 가지 섹스를 성적 환타지로 즐기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다. 게다가 이 책에는 사진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러 모양의 여성성기, 보지를 그린 그림도 실려있다. 베티 도슨 자신이 바디 섹스 워크숍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에서 오는 음탕한 발상을 자신의 성적 환타지로 활용해 자위도 했다고 하니 페미니스트 서적이라고 해서 이렇게 쓰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글쓴이ㅣ팍시러브 핑크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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