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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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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일단, 미리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에 하나의 합의는 필요하겠다. 필자는 본 영화를 '어렵게' 독해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한국 에로 영화의 계보를 줄줄이 나열한 후 본 영화가 그 중 어느 지점에 어떻게 위치하는지를 고찰한다거나, 등장 인물에 성행위에 내포된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상징 코드를 읽어낸다거나 할 뜻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그럴 능력도 안 되고 솔직히, 그래야 할 필요도 못 느끼겠다). 봉만대 감독은 “섹스 영화를 만들었다”고 분명히 밝혔다. 거기에 무슨 리얼리즘이니 인간성이니 복잡한 개념들을 삽입시키는 것은. 자칫 감독과 영화에 대한 잘난 척 비슷하게 될 수 있다. 만든 너는 에로 출신답게 섹스 장면이나 줄창 찍어댔지만, 보는 나는 그 와중에서도 이러저러한 심오한 의미들을 뽑아낼 수 있다는, 짐짓 한 층 위에서 영화를 내려보는 듯 한 태도, 이거 별로 좋지 않다. 동시에, ‘에로 감독 봉만대’에 대한 혹은 ‘에로 영화’에 대한 삐딱한 편견과 비하에도 분명히 반대하고 싶다. 섹스 영화 전문 감독이 섹스 영화를 만들었고, 결과가 우리 기대에 걸맞는 매우 훌륭한 수준의 섹스 영화로 나타났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우리 극장에 에로 영화도 많고 섹스신도 넘쳐났지만, 때로는 불륜도 있고 근친상간 비슷한 설정도 있었으며 강간도 있고 윤간도 있고 그랬지만, 과연 그 어느 영화가 이처럼 세밀하고도 필 꽂히는 섹스신을 주구장창 보여주었단 말인가. 장선우의 섹스 영화와 봉만대의 섹스 영화, 욕을 하건 환호성을 올리건 그거야 각자의 자유겠지만, 그 기준은 동일해야 한다. 손가락 애무 후 흥건히 묻어 있는 애액을 바라보는 남주인공, 오럴 섹스 중 입 언저리에 붙은 음모를 무심하게 떼내는 여주인공, 그 막강한 장면들을 음습한 만화 가게 쪽방이나 우리 집 비디오가 아닌 최신 시설의 복합 상영관에서 보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 영화 여기까지 왔다” 박수 쳐 줄 일 아닌가? 구성이 허술하다느니 서술 구조가 약하다느니 스토리 라인이 평범하다느니, 꼭 그런 얘기 하나 걸침으로써 이제 막 꼴릴 준비하던 관객 허탈하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본 영화의 러닝타임 85분은 15차례의 크고 작은 섹스신으로 점령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봐 주고 내킬 때 꼴려주고 그러면 된다. 조금 더 열의가 있다면, 감독이 제시한 여러 상황들을 통해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을 짚어내어 자신의 명랑 생활에 적용 발전시키면 좋겠다. 카트린 밀레가 자신의 성생활을 회고하며 말했듯이, 때때로 극한의 자극은 '열렬함'이 아닌 '담담함'에서 온다. 이 영화 역시 그 담담함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아(김서형)의 목소리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자 자극 포인트로 ‘사운드’를 들지만, 필자 또한 그 지적에 십분 동의하지만, 그것을 ‘침실 사운드’로만 국한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영화의 시종에 걸쳐 별다른 굴곡을 허용하지 않는, 때로는 나른하며 때로는 당당한 그녀의 목소리야 말로 본 영화의 ‘사운드’가 제공하는 최고의 자극점이다. 이것은 ‘부끄러움(심하면 울음) → 격정(역시 심하면 울음) → 결별의 눈물(혹은 사랑의 환희)’로 이어지던 수많은 여주인공들의 ‘침대 목소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반면 동기(김성수)의 목소리에는 부침이 가득하다. 원나잇 스탠드를 스테디 섹스로 만들어보고자 전화를 걸 때 이것저것 연습해보던 설레임과 조심스러움, 초반부 섹스에서 나타나는 흥분 및 열정, 중반부의 자기중심적 무심함, 이별 후 재회 장면에서의 비참함과 쪽팔림까지, 남자는 매우 다양한 톤으로 감정의 업다운을 드러낸다. 이 '담담함'과 '오르내림'의 대비가 '자격 있는 女'와 '자격 없는 男 '의 그것으로 치환되었다면 필자의 오버일까? 굳이 ‘침실 사운드’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면, 두 사람의 성기(혹은 다른 그 무엇)가 맞부딪치는 그 소리-찌걱찌걱-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들이 내뱉는 신음소리에 주의해보라. 첫 번째 두 번째 섹스를 통해 낭랑하게 울려 퍼지던 ‘그들’의 신음소리는, 중반 이후 점차 ‘그녀’를 배제한 채 ‘그’만의 목소리로 축소되어 버린다. 고속버스에서의 오럴 섹스에서는 아예 신음 소리 자체가 소거되었고, 남자가 우격다짐으로 시도하는 항문 섹스 장면에서는 흥분 아닌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오며, 잠든 동기의 손을 붙잡은 채 자위하는 장면에서는 ‘전혀 그녀답지 않은’ 억제된 신음이 새어나올 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아의 신음이 다시 터져 나오는 것은 동기와의 단절을 결심한 후 옛 애인 기혁과 다시 나누는 섹스 장면에서이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기혁과의 섹스에서 그녀는 역시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몸과 마음이 모두 착한, 매우 매력적인 (필자가 언제나 꿈꿔오던) 파트너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적어도 그를 만나고 있던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그’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를 정말 사랑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한 섹스 파트너로 규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뭐, 그건 중요하지 않다. ‘파트너’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눈살을 찌푸릴 필요도 없다. 그 또한 인간관계의 한 방식이고, 다른 커플에 비해 섹스의 비중이 좀 더 크다고 해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거라 여길 만큼 필자는 순진하지 않다. 좋단 말이다. 그러나, ‘파트너’의 관계 맺음은, 오히려 ‘애인 사이’ 못지 않은 섬세함과 조심스러움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이 영화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이 섹스뿐일지라도, 그리고 상대방이 그 점에 동의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가 상대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라이센스가 될 수는 없다. 섹스의 비중이 큰 만큼 그/그녀와의 섹스는 보다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며, 그/그녀와 함께 있는 그 시간만큼은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여야 한다. 어느 한 쪽이 그것을 어기기 시작한다면, 가장 신속하고 철저한 방법으로 서로를 원하던 두 사람은 또한 가장 빠른 속도로 철저히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본 영화의 결말이 그러했듯이, 때늦은 후회와 아쉬움을 고백하고 사과하는 병신짓은 먼저 어긴 쪽의 몫이다. 그래, 정정해야겠다. 어쩌면 진정으로 상대를 파트너로 규정했던 것은 신아(김서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사랑으로 표현했다. 상대를 사랑하면서도 파트너 이상의 표현을 보여주지 못했던 동기(김성수)의 미숙함과 정확히 대별되는, 진정 노련하고 매력적인 여성상을 본 영화는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명랑사회구현을 꿈꾸는 여러분이 보고 배워야 할 모범은 누구일 것인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 “솔직히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할 자신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싫증 내는 그 순간, 더 이상 참아내고 싶지 않다.” -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중 신아의 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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