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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해변의 여인 - 별과 북극곰, 그리고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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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변의 여인]

내가 맨 처음 술의 위력이란 걸 체험한 것은 스물한 살 어느 여름날의 MT에서였다.

그날 처음으로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셔 보았는데 술에 취하자 내 몸에서는 당연한 듯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꼬장을 부린다거나 토한다거나 운다거나 잠들거나 뭐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좀 유식해 졌다고나 할까? 내가 취하기 전까지 그 술자리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신변잡기식 잡담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술 취한 내 입에서 뜬금없는 예술과 정치, 자본과 여성을 주제로 한 달변들이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가 모두 잊어버린 책의 구절들이 흘러 나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떠들어 댄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날 내 입에서 나오는 고부가가치의 단어들 때문에 말하면서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알콜이 불러온 순작용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한 동안 그 증상은 계속되었고 덕분에 술만 먹으면 나는 약간 지적인 여자로 변모할 수 있었다. (물론 술이 깨면 무식한 원래 상태로 재빨리 돌아왔다.)

그러다 한 남자와 진지하게 사귀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이번엔 ‘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교훈적인’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담배꽁초 길거리에 버리지 마라,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북극곰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던가? 어쨌든 가관이었다. 헤어지자는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도 ‘제발 담배꽁초 길거리에 버리지 마.’였던 걸로 기억한다. 젠장.

그 후 남자들을 좀 더 많이 만나게 되었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나만큼만 대충 썩은 남자를 찾아 도시를 쑤시고 다니던 시절, 그때부터는 더 이상 지적인 술주정도, 교훈적인 술주정도 하지 않았다. 술주정을 계획 하에 선별해서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희한하게도 술주정의 양상들이 조금씩 자리 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영화 [해변의 여인]

누구나 한 잔 마시고 두 잔 들이붓다 보면 기분이 알딸딸해 지기 마련이다. 뇌의 시상하부를 지적인 단어들이 한바탕 훑고 지나가고, 이어서 교훈적인 단어들이 한바탕 훑고 지나가지만 그때까지는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그 정도는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술 발이 강해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지적’, ‘교훈’ 다음에 뭐가 찾아왔냐면, 그건 바로 ‘낭만적인’ 단어들이었다. 이놈들은 뇌의 신경전달 물질을 완전 장악해 버려 몇 년 술 발 내공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하다. 결국 나는 입을 연다. 입에서는 술술 ‘낭만적인’ 표현들이 흘러 나와 강을 이룬다. 이 넘치는 ‘낭만’을 그와 공유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 

내 친구 김은 좋아하던 남자와 진탕 술을 먹던 날, 어릴 적 강가에서 잃어버린 ‘쓰레빠’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 강은 일생에 단 한번 목격한 ‘별똥별’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같은 반에 있었던 바보 친구와 진짜 우정을 나눈 이야기도 했다고 했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해지는 풍경을 보며 펑펑 운 이야기를 했던가? 마루 밑에 벗어놓은 아버지의 낡은 구두 이야기도 했던가?

낭만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흘러갈 때 즈음이 되면, 술병은 배로 늘어나 있고 서비스 안주가 하나쯤 도착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마도 섹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아는 나는 몸을 배배 꼬면서 좀 더 낭만적이 된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진다. 

그러나 낭만의 폭주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여관방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매번 얼마나 무참하게 현실적이었는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 같았던 소울 메이트에게 털어놓은 그 많은 비밀은 게워 낸 안주와 함께 변기통으로 사라진지 오래고, 남은 건 낯선 남자의 계면쩍은 얼굴과 갈아입지 못한 속옷의 찝찝함 뿐. 

그런 아침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적인 것’과 ‘교훈적인 것’만큼이나 ‘낭만적인 것’ 역시 더 이상 알콜의 순작용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평일 저녁 명동의 한 극장에서 홍상수의 영화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어찌나 웃어댔는지 모른다. 특히 술에 잔뜩 취한 문숙(고현정)이 캄캄한 해변에 서서 중래(김승우)에게 ‘내가 진짜 믿는 건 바로 별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엔 내가 그 해변가에 서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랬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별들을 거론했었던가! 

그 순간만큼은 꼭 그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맨 정신으로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말, 아니 털어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말, 평소엔 뇌의 시상하부가 아니라 발바닥의 각질 쪽에 가깝게 붙어 있었던 잃어버린 단어들이 불쑥 치고 올라와 그와 나 사이에 붕붕 떠다니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신이 내린 타이밍까지 느끼게 된다. 그 순간, 별이나 나무, 바람, 북극곰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순하고 평화로운 단어들 중, 도시인들이 쉽게 잊고 사는 하지만 소중하다고 믿는 어떤 단어 하나를 불쑥 내뱉음으로 인해 그와 내가 우주의 거대한 진실과 마주선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딱 한 가지의 진실만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마도 섹스’이다.


너랑 자고싶다
 

영화 [해변의 여인]

문숙은 외로움과 아버지, 별에 관해 이야기 하고, 중래는 그런 그녀를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그녀와 자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내 기억과 상당히 겹쳤다. 나는 뭐라고 뭐라고 떠들고, 남자는 끝없이 들어준다. 속으로는 ‘웬 별 타령, 북극곰 타령?’ 했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준다. 그리고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대답 대신 말한다. ‘너랑 자고 싶어.’ 

그렇다. 여자에겐 북극곰이 남자에겐 섹스다. 남자는 안다. 여자가 집요하게 별과 북극곰 이야기를 할 때 남자는 집요하게 자고 싶다고 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것을. 그렇다고 남자가 진짜로 북극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구의 온난화에 관여하려고 하면 오히려 흥이 깨질 수도 있다. 이때는 남자가 현실적일 수록 여자가 지닌 낭만성의 주가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뻔하고 뻔한 상황일 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 그냥 우리 몸의 화학물질들이 그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을 뿐이다. 어릴 적 받아쓰기에 나왔던 문장들, 하천가에 걸려 있던 낡은 쓰레빠의 이미지들이 얽히고설키어 술 오른 밤, ‘아마도 섹스’가 대기하고 있는 밤이면 조잡한 데코레이션을 장식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별 말고 또 하나의 늪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해요’이다. 문숙은 중래와 섹스하기 전에 계속 ‘사랑해요’ 라고 말한다. 며칠 뒤 만난 여자 선희는 아예 해변에다 대고 ‘사랑해요’라고 외쳐댄다. 그녀는 중래에게 ‘저는 감독님과 섹스 안 할 거에요.’하고 설레발을 치기도 했지만 소주 병을 손에 든 채 ‘사랑해요’를 외쳐대는 건 사실 안 봐도 북극곰인 행동이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랑해요’를 내뱉는다. 북받치는 감정을 감출 길 없어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와 함께 ‘사랑해요.’라고 하기도 하고, 사랑하냐고 십초에 한번씩 묻는 연인이 귀찮아 껌 씹으며 건성으로 ‘사랑해’라고 하기도 하고, 떠나는 연인에게 마지막 손수건을 던지듯 ‘사랑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다른 ‘사랑해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섹스 하기 직전의 ‘사랑해요’에 대해서는 좀 알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아마도 섹스’ 이전에 한껏 몸을 배배 꼬며 남발하는 이미지들이 언어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술 깨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말처럼 고무된 내 낭만성의 정점에 서 있는 말, 그것이 바로 ‘사랑해요’인 것이다.


환상이 깨지다


영화 [해변의 여인]

그러나 섹스가 끝나면 상황이 재빨리 바뀐다. 여자는 현실화 되고 남자는 관념화 된다. 문숙과 중래도 그러했다. 진짜 믿는 것은 별이라던 그녀는, 그렇게 자유롭고 쿨 한 영혼 같았던 그녀는, 고작 이틀 뒤 중래와 선희가 현관 문 앞에서 술 취해 자고 있는 자신의 몸을 타넘어 갔다는 꼬투리를 잡아 그걸로 중래를 계속 괴롭힌다. 그녀가 하는 말은 오직 두 가지 뿐이다. ‘늬 들 잤지?’ 와 ‘늬들이 날 넘어갔지?’

중래는 또 어떤가? 창욱(김태우)이와 내가 너를 동시에 원하고 있는데, 너는 누굴 택할 거냐고 묻고, 문숙이 혼자 낭만에 빠져 있는 동안 일관되게 자자고 꼬드기고 취한 와중에도 현실감각을 살려 창욱을 보기 좋게 따돌릴 뿐 아니라 문 열린 펜션까지 귀신같이 찾아냈던 그는, 그녀와 자고 난 뒤 갑자기 관념화 된다. 자신은 평생 이미지와 고통스럽게 싸웠다고 하고, 난해한 그림을 그려가며 관습화된 이미지를 벗어나 다른 것을 봐야 한다고 괴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영화 [해변의 여인] 

섹스가 끝난 뒤 여자는 생각이 많아지고 남자는 말이 많아진다. 어쩌면 햇살이 들이치는 여관방에 빤스를 뒤집어 입고 앉아서는, 애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섹스 파트너만은 아닌, 관습화된 관계를 탈피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아니 자신은 그런 관계를 오랫동안 꿈꿔 왔노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이 남자가 오늘 오후에 잘 들어갔냐는 전화를 할까, 혹은 이 남자를 또 만나야 하나를 생각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뿐인데, 더 이상 별도 북극곰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전화콜?’, ‘커플탄생 조심스레 예측?’ 등의 합성 단어만이 머릿속을 떠다닐 뿐인데 남자는 왜 그걸 모르고 이상한 소리만 늘어 놓는 걸까? 왜 어젯밤처럼 명쾌하게 말하지 않는 걸까? 

그건 어쩌면 욕망이 거세된 뒤 비로소 여자의 낭만에 뒤늦은 맞장구를 쳐 주기 시작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자들이 표현하고 싶어하는 낭만은 안타깝게도 별이나 북극곰이 아니라 바로 ‘애인은 아니지만 섹스 파트너라고만은 할 수 없는 새로운 발전적인 관계’, 뭐 이런 것들이다. 여관방 아침의 비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미화된 기억

영화 말미에 중래가 해변가를 떠날 때 우리는 커다란 표석 하나를 보게 되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최고의 해변 신두리]. 

해변에는 황사가 자욱하고, 손님 없이 텅 빈 펜션은 턱없이 비싸고, 기품 있어 보이던 부부는 키우던 개를 버리고 도망가 버린 최고의 해변... 힘주어 말하지 않으면 안습이 발생하는 우리의 청춘도 그랬다. 최고의 연애가 되길 믿었으나 실상은 잔머리 굴려가며 뻔한 수작만 늘어놓다 개 버리는 주인처럼 줄행랑을 쳐 버린 기억들만 황사처럼 자욱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어쩌면 신두리가 최고의 해변이었노라 기억될런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그 뻔한 수작들이 최고의 연애처럼 기억될런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게 된 별과 북극곰과 쓰레빠 마저도, 집에 갈 걱정부터 늘어놓는 중년의 어느 술자리에서는 그리운 살별처럼 추억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게 바로 세월의 힘이니까.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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