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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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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나고 담담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험난한 명절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담담하지 못하다. 명절직후에 포털 사이트의 유부녀 까페에 들어가 보면 한국 사회의 명절이 기혼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매우 상세히 알게 된다. 허리가 부러지도록 전 부치고 나물 다듬고 설거지 하다가 몸살 난 이야기, 친정에 못 가 눈물 바람 한 이야기, 시모나 시누에게 싫은 소리 들은 이야기... 해마다, 명절 때마다 되풀이되는 지겨운 돌림 노래들이다. 제3자가 보기에도 지겨운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지독하고 지겨울까나. 영화 [걸어도 좋아] 그런데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아내들의 이야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시댁 식구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사실이다. 공격하는 시댁도 물론 싫긴 싫지만 수비를 전혀 못하는 남편은 더 싫다. 아내들이 털어놓는 모든 울분과 푸념은 결국 ‘남편의 태도’로 모아진다. 시댁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시켜도 상관없다. 남편만 제대로 방패막이가 되어 준다면, 혹은 남편이 위로라도 잘 해 준다면, 그렇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일인 양 모른 척 하거나 아예 시댁과 한 편이 되어 함께 공격하는 남편을 보면 정말 도장을 찍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들의 입장은 어떠할까? 평소에 먹고 사느라 죽도록 뺑이 치는데 명절이라도 좀 쉴 수 있게 내버려 두면 좋으련만, 일 년에 고작 두 번 뿐인 명절인데 늙고 불쌍한 우리 부모에게 맘에 안 들어도 사근사근하게 대하면 어디가 큰일 나나? 내가 억지로 납치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한 집 안의 며느리가 되기로 작정 했으면 저 정도 수고는 각오를 했어야지, 해마다 사람을 볶아대니 괴로워 못 살겠네. 누구는 아들 노릇, 사위 노릇 하느라고 힘 안 드는 줄 아나? 뭐 대충 이런 울분의 말들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 가족, 친족주의로 똘똘 뭉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배려와 희생’같은 낡은 미덕이 꼭 필요하다. 누군가는 낡은 미덕의 거적대기를 뒤집어 쓰고 꾹 참아야, 가족과 친족 집단들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2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데는 타이밍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처음 눈이 마주치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의 운명이 필요하지만 순조롭게 잘 사귀다 결혼에 이르는 데는 더더욱 큰 시간의 운명과 그 운명의 수혜가 필요하다. 갑자기 결혼이 두려워 지거나 집안이 망하거나 나이든 누이가 시집을 안 가고 버티는 등, 누군가와 사귀고 결혼하기까지에는 엄청나게 많은 타이밍의 제약이 뒤따른다. 왜 하필 지금 집안이 망하느냐고 울부짖어도 소용없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다는 건 우주의 모든 기운이 우리를 향해 ‘늬들은 잘 될거야’라고 코러스를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타이밍이 맞아 떨어진다는 말을 달리 말하면 남녀가 같은 시간대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시간, 내가 너와 자고 싶은 시간, 내가 너와 팔라우로 신혼여행을 가고 싶은 시간... 같은 시간대 안에 존재하고 있으면 말도 잘 통한다. 서로를 전폭적으로 이해하고 영혼의 교감을 느낀다. 같은 시간대에 있으면 아무리 먼 공간에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혼이 교감하는데 떨어진 공간 따위가 무슨 소용있겠는가, 시차가 달라도 상관없다.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대가 아니라 영.혼.의. 시간대이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건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져 결혼까지 하게 된 남녀가, 막상 결혼한 뒤에는 한 집에서 살면서도 기가 막히게도 다른 시간대를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말한다. 남편이 연애할 때는 안 그러더니 결혼하고 나서 갑자기 지나친 효자가 되었다고. 연애할 때는 안 그러더니 결혼하고 나서는 갑자기 조선시대 남자가 되었다고. 부모 속을 어지간히 썩히던 남자도 결혼한 뒤에는 갑자기 부모 생각만 하면 눈물이 차고 넘친다며 아내에게 ‘효부의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결혼 전에 걸핏하면 외박하라고 꼬시던 남자도 결혼한 뒤에는 조금만 늦어도 난리가 난다. 수많은 남자들이 결혼 직후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 버린다. 그건 사실 아내들도 만만치 않다. 자유연애를 부르짖고 양다리, 삼다리도 서슴치 않던 그녀들이 결혼 후 남편의 와이셔츠 깃까지 꼼꼼하게 검사하며 단속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모르는 여자에게 잘못 걸린 전화만 와도 쌍심지를 키운다. 대개 남자는 ‘효도’라는 절대적 가치관 속으로, 여자는 ‘남편과 나 우리 아이만 포함된 가족주의’라는 절대적 가치관 속으로 퇴행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두 사람이 같은 시간대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대로 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백날 말해봤자 쌈 밖에 안 나게 되는 것이다. 3 십대 시절, 나는 가장 완벽한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유학을 가 있거나 감옥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멀리 떨어진 채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한없이 편지를 써 갈기는 것이 연애의 정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습은 못하고 이론만 난무했던 시절의 철없는 생각이긴 했으나 그것은 또한 십대소녀가 품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연애의 로망이기도 했다. 편지는 일방적인 소통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한다고 믿고 써갈기지만 실제로는 남의 집 우편함에 들어가 있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서 편지로는 싸우기도 힘들다. 그저 내 마음을 한없이 담아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다.
이십대 중반, 나의 로망이 잠시나마 실현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애인이 잠시나마 구치소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히 면회를 다니면서 밤마다 스탠드 불을 밝히고 편지를 썼다. 그 전에는 결코 나누지 못했던 속 깊은 대화들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편지로 열심히 풀어냈다. 잔정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었던 그 역시 편지로는 슬쩍슬쩍 속내를 내비쳤다. 한편으로는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하지 않았나 싶다. 편지를 쓰는 동안만큼은 우리가 완벽하게 같은 시간대에 존재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집행유예로 구치소를 나오자 우리의 시간대는 바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우리는 나쁘게 헤어졌다. 헤어진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그와 연락이 닿았을 때 나는 그에게 내가 보낸 편지를 돌려 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요구였지만 그땐 어쨌든 돌려 받고 싶었다. 그와 내가 완벽하게 교감한다고 믿었던 순간, 이미 화석이 되고 유물이 되어버린 순간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었을까? 복원할 수는 없지만 간직하고는 싶었나 보다. 4 ‘시월애’의 허리우드 리메이크작 ‘레이크 하우스(The Lake House)’에는 다른 시대에 살면서 편지로 교감하는 남녀가 나온다. 2004년을 사는 건축가 알렉스(키아누 리브스)와 2006년을 사는 의사 케이트(산드라 블럭)- 두 사람은 호숫가 위의 집 레이크 하우스의 낡은 우체통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체통은 우주의 모든 기운이 입을 벌려 두 사람을 향해 코러스를 해 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타이밍이 지독하게 좋지 못했다. 우체통이라는 마술적인 존재 없이는 서로 마주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집안이 망하고 시집 안 간 누이가 버티고 있는 정도는 댈게 못 된다. 그런데 아예 첨부터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같은 시간대에 머물도록 만들어 주었다. 감옥이라는 단절된 장소가 나와 옛 애인에게 완벽한 교감을 허용해 준 것처럼, 물리적인 시간의 어긋남은 그들에게 감정의 무장해제를 허용해 준 것 같다.
물론 영화는 그들이 진짜 연애를 시작하려는 순간에 끝이 나니까 물리적인 시간대를 극복하고 드디어 만나게 된 두 사람이 과연 계속해서 같은 시간대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여느 커플들처럼 지금 어느 시대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얼른 2004년으로 꺼지라고 삿대질에 멱살잡이까지 하다 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5 2017년 1월을 함께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동시대인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최순실문제로 시끄러운 한반도에 같이 등 대고 살면서도, 도무지 어느 별에서 온 외계인인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과는 그저 알고 지내기도 힘든 판에 이 사람이 내 연인이고 내 남편, 마누라라니 얼마나 더 괴로운 노릇인가... 그러나 여기서 부실하고 낡은 미덕을 하나 들이밀어 보자면, 애초에 그와 내가 절묘한 타이밍 안에서 찧고 까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실은 그 타이밍이라는 것이 엄청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의 시간대에 내 시간을 끼워 넣기 위해 무진장 노력한 덕분에 우리의 타이밍이 화투패처럼 짝짝 맞아 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의 알렉스는 케이트를 만나기 위해 2년을 기다린다. 그녀와 우연처럼 마주치기 위해 회사 앞에서 두 세 시간씩 벌 선 기억들을 한번 떠올려 보라. 우연을 가장하기 위한 가엾은 몸부림들을 한번 추억해 보라. 온 우주의 코러스를 듣기 위해서는 ‘노력’이라는 낡은 미덕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6 세상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란 없는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내 맘의 영역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육체나 영혼이 이 지구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어긋난 시간이라 하더라도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 레이크 하우스의 우체통처럼 서로를 이어주는 마법 같은 장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찾아보는 건 또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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