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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사랑은 없었다 - 사랑, 그 잔인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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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행복] 클럽을 운영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남자 영수(황정민). 운영하던 가게는 망해서 친구에게 인수 하고, 애인인 수연(공효진)과도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앓고 있던 강 경변이 더 심해지자 시골에 있는 요양원 ‘희망의 집’으로 내려간다. 거기서 영수는 폐질환을 앓아 3년째 요양 중인 은희(임수정)를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영수와 은희는 점점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고,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희망의 집’에서 나와 한적한 시골에 살림을 차려 살게 된 은희와 영수. 하지만 은희의 지극 정성으로 병이 나은 영수는 점점 도시에서의 생활이 그리워지고, 끝내 은희를 버리고 다시 옛 애인 수연을 찾아가게 된다. 은희는 아픈 몸으로 혼자 영수를 기다리며 외롭게 지내다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임박해오고, 이즈음 다시 병이 도지고 처음 희망의 집을 찾을 때 보다 더 상태가 나빠진 영수는 은희를 만나 지난날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은희는 명을 달리하게 된다. 2007년 개봉 이 영화에는 사랑. 그 잔인한 행복 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은희와 영수의 사랑은 아주 잠깐 동안만 유효하다. 즉 그들이 함께 병을 앓고 있을 때,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영수가 은희에게 의지 할 수 없을 때 까지만 지속되는 사랑이다. 도시에서 난잡한 생활을 했던 영수와 달리 은희의 삶은 단순하다. 그래서 쉽게 행복할 수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아침 체조를 하고, 밭에 나가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그날의 양식만 해결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옛 애인과 친구의 방문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영수가 노후 자금이 얼마가 필요하다고 말 하는 장면에서 은희는 말한다. 자신은 내일 같은 거 모른다고, 그냥 지금처럼 쭉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한때 영수는 그런 은희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건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사랑이 아니었다. ‘희망의 집’에서 한 방을 쓰는 폐암을 앓고 있던 남자의 죽음. 그로 인해 영수는 자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음에 큰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영수는 은희의 사랑으로 잠시나마 현실의 두려움을 잊고 살게 된다. 영수는 은희를 사랑했다기보다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수단으로 은희를 택했던 것이다. 은희가 처음 영수와 함께 살 것을 제안할 때, 은희는 남자와 미래를 함께하려고 마음먹은 여느 여자들이 그러듯 ‘나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어요?’라고 묻지 않는다. 다만 그녀는 ‘내가 영수씨 병 낫게 해 줄게요’ 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은희의 사랑은 희생을 전제로 한 사랑이었다. 그저 그가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은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를 지켜주고 사랑해주리라 각오 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말을 한 그 순간부터, 병이 나은 후 영수가 은희를 버릴 것이라는 사실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은희는 함께 사는 이유를 영수의 병을 낫게 하는 것에서 찾았고 (그렇게 말했고) 진짜로 병이 낫자 영수는 더 이상 은희의 곁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흔히 드라마를 보면 갖은 고생을 함께 하며 뒷바라지 하던 애인을, 출세하게 되자 헌신짝처럼 버리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왜 성공하자마자 옛 애인부터 버리려고 할까?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고생하고, 힘든 일을 함께 겪어왔으면서 어째서 그들은 스스로도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그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스스로 원해서 힘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힘들다는 것은 분명 주변 상황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혹은 영수처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큰 병을 앓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행복해야 한다. 그래야 그 힘든 일들을 죽지 않고 살아서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허나 이런 특수성을 전제로 한 행복은 그 특수성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 또는 다시는 되돌아가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아팠던 은희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본 지 아주 오래된 여자이다. 하도 오래되어서 예전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병을 이겨 나가야 한다. 4분의 1만 남은 폐는 그녀를 달리지도 남들처럼 빨리 밥을 먹지도 못하게 한다. 그리고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아야 한다. 그녀에게 행복이란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이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내일이 아닌.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기는 매한가지인 영수의 지금 이 순간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영수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기기를 원할 뿐. 행복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런 진지한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사람은 변한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사람은 변하기도 하고, 또 변하지 않기도 한다. 가끔 변한 듯 보인 사람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오로지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변했다고 믿겠지만 그렇지 않다. 변할 수밖에 없도록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달라지게 한 그 환경이 바뀌면, 그 변화 역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은희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영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또 영수 역시 그렇게 변하기를 원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영수는 건강을 찾자마자 이전의 생활을 그리워했고, 끝내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준, 그러나 본인은 그 병을 그대로 지닌 아픈 연인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영화에서 영수는 은혜도 모르는 천하의 나쁜 놈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는 종국에는 그 벌을 받게 된다. 다시 클럽을 운영하게 해 준 친구에게도 버림받고, 사귀던 옛 애인 수연과도 또 다시 이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몸은 점점 더 나빠지고, 그는 거의 행려병자와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다. 만약 이때에 은희가 나타나 다시 한번 손을 내 밀었다면 그는 또 다시 은희의 보살핌을 받으며, 은희의 곁에서 잠깐의 행복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장담하건 데 그가 만약 또 한 번 기적적으로 병이 완치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시 은희를 버릴 것이다. 잔인하지만 은희의 행복은 오직 영수가 아플 때, 그래서 도저히 이전의 삶 같은 건 그리워하지도 떠올리지도 못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영화 [행복] 그렇다면 영화에서 천사표로 등장하는, 그리고 끊임없이 희생하며 영수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와도 같은 은희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것일까? 물론 은희는 착하다. 하지만 그 착함이 혹시 그녀의 병이라는 또 가난한 고아라는 조건들이 만들어낸 특수한 상황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에게 만약 건강이, 그리고 돈이 있었다 해도 여전히 영수의 곁에서 그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을까? 미안한 얘기지만 은희는 그렇게밖에 살 수 없어서 그렇게 산 것이었다. 물론 병이 걸렸다고 해서 누구나 은희처럼 천사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인간이었던 영수조차도 잠깐 동안은 착하게 변했던 것을 보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은희는 자신의 상황에 꼭 맞는 사랑을 한 것이다. 내일이라는 미래가 없는 그녀는, 영수처럼 방탕하게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희생을 하고, 그 사람의 고마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 받고 싶었던 것이다. 떠나려던 영수에게 그녀가 한 말은 두 가지였다. 어떻게 니가 나에게 그럴 수 있냐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앞으로 내가 더 잘 하겠다고. 첫 번째 말은 그녀의 희생이 아무런 보답을 원하지 않는 희생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만큼 잘 했으니까 너는 내 옆에 있어야 한다는, 그래서 내 사랑이 완전해지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말은, 안타깝지만 사랑이 희생이라고 믿은 은희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말이다. 내가 온 몸이 부서지도록 잘 할 테니까, 너는 내 옆에 남아서 비록 알맹이 없는 형태로나마 사랑을 유지해 달라는 것이다. 말은 다르지만 결국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은희에게는 같은 말 인 것이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물론 희생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사랑은 희생을 포함하고 있지만 희생이 사랑 자체는 아닌 것이다. 즉 희생을 했기 때문에 사랑이 생겨야 한다고,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 노력했으니 너는 당연히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영수가 은희를 떠나면서 잠시나마 괴로워했던 것은 사랑을 버려서가 아니라 그녀의 아픔을 동정했고, 자신을 위해 한 희생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영수는 분명 은희로 인해 몸의 병이 낫는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은혜가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 일 뿐이다. 사랑 하니까 희생할 수는 있지만 희생했으니까 사랑이 생겨야 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영화에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은희와 영수는 모처럼 읍내에 나가서 함께 중국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조금 먹다가 은희는 입맛이 없다며 젓가락을 놓는다. 자장면을 맛있게 먹은 영수는 나중에 영화관에서 왜 은희에게 음식을 먹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그때 은희는 말한다. 음식 안에 바퀴벌레가 있었다고, 하지만 영수씨가 너무 맛있게 먹는걸 보니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나는 이 장면에서 은희의 사랑을 읽었다. 은희의 사랑은 음식에 바퀴벌레가 들어가 있으니 그만 먹으라고 사실을 말 해주는 사랑이 아닌. 달게 먹는 모습이 너무나 좋아 보여서, 차라리 사실을 모르고 그가 자장면을 맛있게 먹기를 지켜보며 미소 짓는 사랑. 둘 중 정답은 없겠지만. 은희는 문제의 본질보다는 그 문제에서 파생되는 것들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여자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은희는 이미 마음이 떠난 그에게 자신이 더 잘 할 테니 그저 옆에만 있어달라고 애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 나는 사랑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잠깐 동안 사랑이라고 착각한 행복은 있었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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