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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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500일의 썸머] 사랑할 때마다 신기한 것은 처음에 느꼈던 감정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를 만나건 어떤 형태의 연애를 하건 어김없이 찾아왔다. 때로는 그 시간이 조금 더 빨리 때로는 조금 더 늦게 올 때도 있었지만 아예 찾아오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를 반하게 했던 미소도, 어떤 소음 속에서도 들을 수 있었던 말투도,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는 사소한 습관들. 오직 세상에서 나만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런 시간은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 축하 카드를 만드는 회사에서 카드에 적힐 문구를 작성하는 일을 하던 톰은 어느 날 새로 들어온 비서 썸머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썸머도 그가 싫지 않은 눈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톰은 마침내 썸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들은 이케아 매장에서 사지도 않을 가구들을 보며 마치 미래에 있을 신혼 생활의 놀이를 한다. 둘은 뭘 해도 기쁘고 뭘 해도 웃음이 난다. 사랑은 사소한 것들을 예사롭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남들이 들으면 아무것도 아닐 일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기억들이다. 둘만의 암호를 만들고 남들 앞에서는 창피해서 하지 못할 닭살이 돋는 말도 서슴없이 하게 만든다. 어제와 다른 세상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근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랑은 그런 설렘들을 계속 지속시키지 못한다. 도파민의 문제든 마음의 문제든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 시간만큼의 티가 난다. 물론 갈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커플들도 있겠지만 그건 극소수일 뿐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우리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옅어지다가 마침내 희미해지거나 시시해져 버린다. 톰과 썸머도 마찬가지다. 썸머는 이제 더 이상 이케아에서 톰의 장난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둘이 함께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어 놓아도 그 옆을 무심하게 지날 뿐이다. 영화는 톰과 썸머가 보낸 500일을 날짜별로 보여준다. 그러나 1일 다음에 반드시 2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속의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그래서 이들이 변화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사랑은 왜 변하고 식는 것일까? 처음의 그 열정 그대로 끝날 때까지 갈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랑은 가지고 싶은 물건과 비슷하다. 처음 그 물건을 찜 해 놓고 내 것이 될 때까지는 그 물건이 내 삶에 꼭 필요할 것만 같다. 드디어 물건을 손에 넣는 날. 한동안 대체 이 물건 없이 내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싶다. 하지만 물건은 조금씩 낡아간다. 그리고 그 물건이 세월에 낡아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는 그 물건이 주었던 기쁨과 설렘을 잊어간다. 그러다 마침내 그 물건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그저 그 전에 샀던 수많은 물건 중 하나가 될 뿐이다. 있으니까 있는 물건, 사라져도 딱히 애타지 않을 물건. 500일의 썸머는 썸머의 입장이 아닌 톰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흔히 사랑 얘기에 여자가 주인공인 것과 달리 톰은 이 영화에서 사랑의 여러 가지 감정들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만나 설레는 것부터 익숙해짐과 실증, 분노와 그리움까지 그는 차례로 겪게 된다. 톰은 썸머가 자신의 반쪽임을 확신한다. 그러나 결국 톰과 썸머는 헤어진다. 영화는 500일의 썸머지만 실제 톰이 썸머와 이별하게 되는 시점은 488일이다. 500일은 썸머와 완전히 정리가 되고 새로운 여자 가을 (극 중 이름이 실제로 가을이다.)을 만난다. 그러니까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이고 여름이 가야 가을이 올 수 있다. 톰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썸머에게 묻는다. 평소 구속 당하는 사이를 싫어하던 그녀가 어떻게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러자 썸머는 말한다. 너에게는 없는 무엇인가를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결국 이유는 그것이었다. 톰은 썸머의 반쪽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썸머는 뭐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톰이 가지지 못한 중요한 무언가를 (혹은 감정을) 준 그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연인이 되면 흔히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한다. 그 말은 그만큼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남이 들으면 시시하기 그지없는 것들이 당사자들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콩깍지는 한번 쓰이면 절대 벗겨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콩깍지는 얇아지고 의미 있던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습관처럼 만나는 서로가 있을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해도 전처럼 가슴이 뛰거나 벅차오르는 감정 같은 건 없다. 그저 서로 당연한 말을 당연한 순간에 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 있다면 그렇게 소중했던 것들이 조금씩 가벼워지다가 마침내는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무게만을 가질 때이다. 그러나 영화는 말한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온다고. 톰에게 다시 찾아온 인연인 가을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톰은 또다시 500일의 날들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가면 또 오는 것 그것은 버스나 기차만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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