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다리다 미쳐]
때는 2013년 여름, 나는 군대에서의 마지막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포의 퀴퀴함과 치약의 알싸함, 땀과 분비물이 그득 밴 옷들에서 은근히 풍기는 빨랫비누까지 갖가지 냄새 때문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곳.
하지만 이 모든 거지 같은 상황도 내일이면 쫑날 것이었다.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시멘트 바닥 위를 슬리퍼로 신나게 미끄러졌다. 분주한 후임들은 경례를 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생활관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평화로움은 끝이 났다. 내 동기들은 이미 차가운 땅바닥에 온몸을 감싸 안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올 게 왔구나!'
후임들의 매서운 눈빛이 천천히 나게 모아졌다.
"쾅!"
나는 생활관 문을 있는 힘껏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왔다. 병사들 사이사이로 피해 가며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야! 빨리 가서 잡아!”
악을 쓰는 후임들의 고함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다.
가까스로 녀석들을 따돌리고 화장실의 세탁기 옆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홍, 홍 병장님...”
들어 온지 3개월도 안 된 신병이었다.
“야 놔. 놔 임마!”
“죄송합니다! 안 모시고 가면 제가 죽습니다!”
있는 힘껏 뿌리쳤지만 녀석은 곤란한 표정을 하면서도 꽉 붙잡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발각됐고 후임들에게 이끌려 생활관으로 이송됐다.
“어허~ 홍스우이!”
“뭐 새끼야?”
양 쪽에서 몸을 단단히 붙들린 채 생활관에 들어서자 모두들 박수치며 소리를 질렀다.
“야, 덮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포가 내 얼굴을 덮쳐왔다.
“움직이면 뼈 나갑니다.”
평소 맷집이라면 자신 있던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집단 린치에는 장사 없다. 그렇게 얼마를 맞았을까 팔과 다리에서는 이미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없어졌다.
“이, 이 개새끼들...”
그렇게 있는 대로 두드려 맞고 나서, 눈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로만 울먹이며 잠에 들었다.
기상 나팔이 울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찬 나팔 소리, 이미 나는 설레는 주체하지 못하고 깨어 있었기 때문에 곧장 복도로 달려나가 뛰어다녔다.
“기상! 기상하시랍니다!”
이제 곧 전역의 기쁨을 함께 맞 볼 동기들과 팔을 벌리고 생활관을 종횡무진하면서 모든 후임들의 모포를 열어제꼈다.
“기상하시랍니다?”
전날 밤 연습한, 더 이상 밉살맞을 수 없는 표정으로 사랑스런 후임들에게 복수했다.
“아이, 씨발 꺼져 미친 새끼야.”
사랑스러운 후임들은 앙탈을 부리며 모포를 다시 얼굴까지 덮고 잠을 청하려 했다.
“그래, 집으로 꺼질게. 낄낄낄.”
나는 온갖 미운 짓을 마음껏 헀다.
아침밥은 대충 씹는 둥 마는 둥 했다. 오후가 되기 전에 전역증을 받고 버스를 탔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21개월의 군 생활이 끝났다. 풍성한 놀 거리와 자유가 보장된 삶. 모든 것이 부대 안과 비교가 안 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노는 것에도 조금씩 흥미가 떨어졌다. 등록금을 벌려고 군생활의 경험을 살려 경비 초소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낮엔 훈련 같은 것도 없고 잡일이 대부분이다. 밤엔 순찰 두어 번이 끝이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야, 뭐하냐?”
대학교 동기였다.
“나? 그냥 있지.”
“할 것 없으면 나와. 학교 애들이랑 술 먹고 있어.”
“나, 2시쯤 끝나는데 그 때까지 하고 있으면 갈게.”
도시락을 까먹고 셀카를 찍고 SNS에 올리고 게임을 몇 판 돌리니 금세 2시가 되었다. 경비 초소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교대 해야지.”
나는 경비를 교대하는 아저씨에게 적당한 인수인계를 마치고 서둘러 교대를 했다. 땀내 나는 경비복을 벗고 파란색 카라티와 반바지로 갈아입고 초소를 나왔다.
“고생하세요.”
“어, 들어가.”
나는 친구가 말해준 술집으로 향했다. 친구들은 이미 상당히 취기가 올라 있었고 정체불명의 술을 말아놓고 나를 맞이했다.
“마셔, 마셔!”
술잔인지 대접인지 모를 잔에는 이것저것 참 많이도 담겨 있었다.
“야, 미친 왜 고명을 이렇게 많이 올렸어.”
“전역한 너한테 극진한 대접을 해주려고 마음을 가득 담아 대접으로 준비했잖아. 성의를 봐서 원샷 해.”
“이게 무슨 극진한 대접이야, 푸대접이지.”
내가 푸를 닮았다는 어쭙잖은 농담을 하며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고 곧장 술을 마구 들이켰다. 일과 학업으로 바쁘게 사는 20대의 삶에서 이 순간만큼은 여유 있게 모든 고민을 술에 섞어 들이키고 싶었다.
술이 몇 잔 들어 가니 몸은 휘청덌지만 기분은 하늘을 날 듯 붕 떠있었다. 술에 취하면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남자애들, 과장된 리액션과 자극적인 스킨십으로 줄 듯 안 따라 줄 듯 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여자애들의 줄다리기를 보는 건 언제나 흥미로웠다.
허탈한 표정의 남자들과 택시를 타는 여자들의 귀가로 술자리가 끝날 무렵. 나는 흐트러진 안경에 불안한 걸음걸이로, 집을 향했다
“오늘 재밌었다. 다음에도 불러!"
“어, 잘 들어가라 또 보자.”
나는 손을 흔들고 뒤로 돌았다.
“불쌍한 새끼들...”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아스팔트에 발을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홍승우!"
함께 술을 마신 여자 동기 J였다.
“뭐야, 너 아직 안 갔었냐?”
“혹시... 한 잔 더할래?”
J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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