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와 연인사이]
일주일간의 지루한 지방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 왔다.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오니 막상 먹을 것도 없고, 뭘 시켜먹기도 번거롭고 나가서 먹자니 불금 저녁시간에 혼자 식당에서 밥 먹을 생각하니 왠지 처량한 생각마저 들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는 무작정 길 건너 마트에 갔다. 사는 동네가 원룸이랑 오피스텔 밀집지역이라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 동네였는지 저녁시간에도 마트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마땅히 뭘 사기도 그렇고 마감 행사하는 초밥 세트랑 즉석 밥과 세일하고 있는 와인을 두 세 병 사고 이리저리 돌아 보고 있었다.
저쪽에서 초등학생형제 두 명이 좁은 마트 식품코너에서 카트를 끌고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저러다 지나가는 사람 카트로 치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때 마침 그 녀석들이 빠른 속도로 카트를 끌고 커브를 돌다가 어떤 여자의 허리쯤을 칠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나는 오른팔로 그녀의 왼팔을 확 끌어 당겨 그녀는 카트에 치이지 않았고, 갑자기 웬 남자가 자기 팔을 당겼나 약간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얘들아 조심해야지..."하며 애써 친절한 척 이야기를 하고는 말없이 돌아서서 다시 뛰어가는 그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살짝 목례를 하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날씬한 몸에 핑크빛 운동복인지 편안한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후드모자를 다시 그 위에 쓰고는 알이 없는 진 갈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피곤한 몸이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 할 여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빨리 들어가서 대충 먹고 일찍 잔 다음 내일 있을 직장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하려는 참이었다.
이리저리 둘러 보다가 와인코너에서 와인을 살펴보고 있는데 아까 본 그녀가 옆에서 맥주를 고르고 있었다. 산미구엘을 카트에 담는 모습을 보니 얼마 전 동남아 필리핀이나 세부에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다. 20대 후반 정도의 여자들이 세부 해변에서 얼음을 띄운 산미구엘을 마셨을 그 황홀함을 잊지 못하고 산미구엘을 자주 마시는걸 알았기 때문에 별 감흥은 없었다.
컵라면 몇 개와 과자 봉지 산미구엘 맥주가 그녀의 카트에 실려 있었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녀도 지루한 주말 저녁을 맥주에 과자나 먹으며 영화나 보며 편히 쉬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나도 내일 선배 결혼식만 아니면,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리대를 사지 않은 걸로 봐서 생리 중은 아닌 것 같고... 혼자서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쿵쿵 아까 본 그 개구쟁이 녀석들이 또 다시 카트를 과격하게 굴리면서 쇼핑하는 사람들의 카트를 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살짝 움직여 아직 이 상황을 모르고 있을 그녀 옆으로 간 다음 그녀의 카트를 손으로 살짝 당겨 주었다. 그 녀석들은 빠른 속도로 또 지나가고 있었고, 생글 웃는 그녀가 목례로 고맙단 인사를 했다.
계산을 하려고 서 있는데, 저쪽에서 그녀도 계산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말이라도 걸어보고 전화번호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었다.
그렇게 계산을 하고는 길을 건너려고 서있는데 그녀도 횡단보도 끝에 이어폰을 낀 채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 번쩍이는 네온사인들.. 듬성듬성 켜져 있는 거대한 오피스텔의 형광등 불빛이 어울려 비록 퀘퀘하고 답답한 도시 속 매연과 소음이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묘한 기분과 함께 설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용기를 내 몇 발짝 걸어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도 내가 자기를 바라보며 걸어오는 친절하고 키가 큰 남자가 걸어오는걸 의식하는 것 같았다.
'저기요..? 제가 출장 갔다가 좀 전에 와서 저녁도 못 먹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치킨에 맥주나 한잔 하실래요? " 라고 물었다. 그녀는 내가 뭐라고 한지 잘 못 들었다는 표정과 약간 시크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한 쪽 이어폰을 뻬며 "네?" 하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는 " 맥주 사시는걸 보니 혼자 드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괜찮으시다면 치킨에 맥주나 한잔 하자 구요.. 저도 저녁도 못 먹고 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괜찮습니다.... 처음 본 사람하고 치킨 시켜먹고 싶지 않네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오른팔을 들어 길 건너 야외에 비치파라솔이 몇 개 있고 사람들이 몇 몇 있는 어느 치킨집을 가리켰다.
"저기... 가자구요.." 라며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눈을 크게 한 뒤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의 두 눈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무안 했는지 살짝 웃으며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흔쾌히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솔직히 속으로는 '그래 거절해라..난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그냥 자고 싶을 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YES' 를 하니 아주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니 '그래 오늘밤 하루만 더 힘을 내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역시 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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