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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일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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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나는 우연이 계속된다고 해서 필연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연은 그냥 말마따나 우연일 뿐이고, 그냥 그런 우연이 몇 번 겹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연이 자꾸 겹치면 최소 신경은 많이 쓰인다 정도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아마 스포츠 센터에서 그녀와 계속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연습실에 있는 그녀를 보고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빗방울은 간헐적으로 굵어졌다가, 다시 잔잔해 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서 차 유리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도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내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며 내 차에 탔고, 그녀는 그 곳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지하철 역에 내려 달라고 했다.
 
“아 그러면 대학생 이신 거군요?”
“네. 좀 늦긴 했지만.”
“그렇구나.”
“그럼 사이토씨는 연극 배우도 하시는 가 봐요?”
“아! 아니에요. 저 여기서 발레 가르쳐요. 그리고 그냥 마리라고 불러주세요.”
 
그녀, 마리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비가 와서 무거워진 습기로 그녀의 샴푸 냄새가 전달되어 왔다. 근데, 발레? 요가가 아니고?
 
“마리씨 요가 강사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
“원래 발레를 오래 했었어요. 그만 두고 스포츠센터에서 일하면서 요가 강사를 했는데, 요즘에는 간혹 지인 통해서 발레에 대한 문의도 오고 해요.”
“연극 배우가 발레도 배우나요? 발레리나 역할을 맡았나봐요.”
“사실 몸으로 하는 표현력을 증대 시키기 위해서 한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우리는 가는 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가 나긋나긋 하면서 밝고, 내가 이야기를 할 때는 별 것도 아닌 것도 굉장히 경청해서 들었다. 대답을 할 때도 신중했다.
 
사이토 마리노가 풀네임인 마리는 올해 스무 살이었다. 아주 어릴 때 호주로 발레 유학을 다녀왔다고 했다. 아!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내가 운동하고 있었을 때 외국인이 등록을 하러 왔는지 기웃거렸는데, 다들 마리를 찾았던 것이 기억났다. 영어를 잘하는 모양이다.
 
“발레는 왜 그만 뒀어요?”
“아……그냥 여러가지 사정으로요.”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인지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괜히 안 좋은 기억을 건드렸나 싶어서 말을 돌렸다.
 
“켄짱이 한국 좋아한다고 그러던데.”
“네! 맞아요. 저 한국 좋아해서 가끔 가요.”
“그래요? 도대체 한국이 뭐가 좋은데요?”
“에? 좋잖아요. 여자분들 옷도 잘 입고, 한국 음식도 너무 맛있고, 연예인들도 다 예쁘고 멋있어요. “
“흠……딱히 동의는 할 수 없지만……음식 빼고……그러시군요.”
“네. 그래서 여러가지 여쭤보고 싶었는데, 운동에 방해 될 까봐 못 물어봤어요.”
“운동에 젤 방해되는 것은 켄짱이죠. 자꾸 가슴을 덜렁……이 아니고 말을 거니까요.”
 
비가 오고, 이상하게 그날 따라 신호는 계속 걸리고, 나도 처음 가는 길이니 버벅대고 해서 차는 하릴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가는 길이 뻘쭘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우리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근데 한국에서 오빠라고 하는 말은 친 오빠한테만 하나요?”
“아뇨.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에게는 오빠라고 하죠.”
“아 그렇구나. 그럼 남자도 남자에게 오빠라고 하나요?”
“그럴 수도 있죠. 죽고 싶으면.”
“네?”
“아, 아닙니다. 여자만 해요. 여자가 남자에게만. 남자는 형이라고 하죠.”
“횽?”
“아니 형.”
“히용.”
“뭐 비슷하네요.”
 
입술을 오므렸다가 폈다 하면서 연습하는 게 귀여웠다. 나는 형 오빠 누나 언니의 차이점을 골고루 설명해 주었고 마리는 열심히 발음을 따라했다. 마리는 나에게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한국음식은 뭐 좋아해요?”
“저요? 떡볶이요. 부침개랑! 근데 이 동네에는 한국 음식점을 별로 보질 못했어요. ”
“아 그래요? 찾아보면 분명 있을 건데……”
 
아주 잠깐, 내가 일하던 그 식당에 데려갈까 했는데, 진한 화장의 사장님이 잠깐 떠올라 말을 하지 않았다. 서로 좋아하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 등의 자잘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난 후에 그녀가 말했다.
 
“신기한 게, 오빠 운동하러 올 때마다 제가 일하는 시간이더라구요.”
“아……맞아요. 그랬죠. 시프트가 자주 바뀌나 봐요?”
“음……그런 것은 아닌데, 그 시간대에 근무하는 친구가 못 나오거나 하면 변경될 때도 좀 있어요.”
“그러면 요가 가르치는 일만 하는 게 아닌 가봐요?”
“그럼요. 거기 있는 인스트럭터들 대부분이 청소도 하고, 사무도 보고, 관리도 하고 그러는 거에요. 수영장 관리나 안전 감독도 해요. 오빠 수영하는 거 몇 번 봤는데?”
 
아 그럼 제가 물살을 가르면서 개 멋있게 잠영 하는 거 보셨겠네요 라는 개드립은 차마 치지 못하고, 왠지 모르게 민망해졌다. 의외로 마리도 자주 반복되었던 그 우연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는 모양이네 하고 그냥 넘겼다.
 
그 차안에서, 우리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얇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서로의 나이와 이름을 알았고, 서로의 취미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했으며, 여행을 자주 간다고 했다. 그녀가 내 취미에 대해 물었을 때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공부하는 건데요 라고 하기도 좀 민망해서, 적당히 영화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원래 집은 센다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지금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혼자 살며 이런저런 공부도 하고 있다고 했다. 나 역시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취하고 있으며, 머리 굳고 공부하려니 힘들다는 이야기 등등을 했다.
 
마리는 매우 훌륭한 대화 상대였다. 말을 중간에 끊지 않았고,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기억하려고 애를 썼고, 자신이 이야기할 때는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다. 진작에 아는 척 하고 말을 걸어볼 걸 그랬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잡담해도 될 지 몰라도 그녀는 근무 중이니까, 안 하길 잘했다 싶었다.
 
나중에, 그것도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마리는 그 센터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 스탭들도 다 그녀를 귀여워 하고 좋아해 주었으며, 그녀에게 작업을 거는 회원들도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회원들에게 일일이 미안하다고 하며 정중히 거절을 했으니, 아무리 사심이 없었다고 해도 나까지 말을 붙였다면 피곤하지 않았을 까 싶기도 했다.
 
“그럼 이제는 오빠를 센터에서 볼 수는 없겠네요.”
“아……그러네요. 학교에 있는 헬스를 다녀서.”
“……뭘 다닌다구요?”
“헬스요. 시설이 좋더라구요. 게다가 학생들은 무료 더라구요. 헬스가 무료라니! 매일 가고 싶던 데요 하하하.”
“음……헬스(ヘルス)라는 게……GYM(ジム)을 이야기 하는 거죠?“
“아 맞아요. 왜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며 애매모호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르는 표정을 짓더니 내게 말했다.
 
“음……있잖아요 오빠. 우선 일본에서는 운동하는 곳을 헬스라고 하지 않아요.”
“아 그래요?”
“네. 쓰시면 안되요.”
“쓰면 안될 정도에요? 한국에서는 그렇게 쓰는데 생각해보니 콩글리쉬네요.”
“네. 일본에서는 다른 뜻이거든요.”
“뭔데요?”
“그……나중에 찾아보세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녀는 뭐가 웃긴 지 쿡쿡 거리면서 웃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일본에서 헬스(헤루스)란 성매매업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방금 전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 학교에 있는 성매매 업소를 다녀서……-

- 성매매 업소요.. 시설이 좋더라구요. 게다가 학생들은 무료 더라구요. 성매매가 무료라니! 매일 가고 싶던 데요 하하하.-
 
……이런 시발 이불킥 감이다.
 
아무튼 그때 당시에는 이유를 몰랐으니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고, 우리가 탄 차는 그녀가 말한 지하철 역 근처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은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비는 거의 그쳤지만 조금 내리고 있으니까, 집 앞에 까지 바래다 준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집 앞까지 바래다 주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너무너무 감사했어요 오빠.”
“아니에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사실 처음 와보는 길이라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는 그래도 덕분에 비를 맞지 않고 왔다면서 연거푸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일본인들이 원체 그러니까, 나도 일본인처럼 아이고 별 거 아닙니다 라고 반복해서 인사했다.
 
“저기 신호 바뀌면 저 앞에서 세워 주시면 되요.”
“그러죠.”
 
이제 신호가 바뀌면, 조금만 직진해서 그녀를 세우주면 되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갑자기 조용해 진 차 안에, 와이퍼가 창문을 긁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이 신호가 바뀌면, 이제 이런 반복되는 우연도 끝이 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아쉬웠다.
 
그때 왜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는지, 그리고 왜 그 신호에서 차 안에서 둘다 말이 없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차 안에서 서로 각자의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아주 짧은 그 몇 초간에 정적에 많은 생각을 했겠 거니 하고 회상하고 추측할 뿐.
 
아쉬운 마음을 모르는 지 신호는 바뀌었고, 조금은 꾸물거리던 내 차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저 앞에서 세워주세요 라고 말했고,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느린 속도로 내 차는 그 곳에 멈춰섰다.
 
“와. 정말 고마웠어요. 비가 너무 와서 멀리 계신 아빠한테 연락해야 하나 싶었거든요.”
“남자 친구한테 연락하는게 아니구요?”
 
뭔가 아저씨스러운 견제구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떠보는 내가 참 웃겼지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 친구가 있어야 연락을 하죠.”
“아아. 그랬구나. 남자 친구 아니더라도 뭐…….연락하면 누구라도 왔을 텐데.”
 
내 말에 마리는 그냥 웃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마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뭐를 요?”
“오늘 태워다 주셨잖아요.”
“네.”
“그러니까 저는 고맙구요.”
“네…에”
“그러니까 제가 보답의 의미로 식사라도 살게요.”
“아…음……그러니까……”
“식사라도 하려면 서로 연락처를 알아야 하겠다! 그쵸?”
“그렇겠네요?”
 
마리는 약간은 덜 떨어지는 내 리액션에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말 뜻을 이해한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내밀었고, 일본 휴대폰에는 어디에나 그 기능이 있는, 적외선 연락처 송수신으로 그녀의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일본의 휴대폰의 문자 전송 시스템은 C메일과 E메일이 있다. C메일의 경우, 같은 통신사일 때 전화번호로만 전송이 가능한, 우리나라 문자 메시지와 동일했으나, 스마트 폰 출현 전이라 요금이 꽤 부과되는 편이었다. 반면 메일 주소로 서로 수발신을 하는 E메일의 경우 거의 요금이 들지 않기 때문에, 서로 메일 주소를 주고 받아 연락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 극악무도하게 긴 메일 주소를 쓰는 경우에는 일일이 메일 주소를 쓸 수가 없어서 휴대폰마다 적외선 송수신 기능이 있다. 그 기능을 쓰면 한 번에 메일 주소와 이름, 연락처 공유가 가능하다. 그래서 인지 특이하게도 일본의 여자들 사이에서는, 남자에게 전화번호는 줘도 메일 주소는 쉽게 안 준다 라는 말이 있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스마트폰 그리고 라인의 등장으로 사라진 개념이긴 하지만.
 
그렇게 마리는 내 대신 용기를 내 주고는 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왠지 오늘 과외 학생의 책을 가지고 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내려서 골목 쪽으로 사라지자 마자 정말 거짓말처럼 비는 멈췄고,  나는 다시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 이후에 우리는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다. 처음 용기는 그녀가 내 주었으니까, 나는 그 다음날에 그녀에게 먼저 메일을 보냈다. 물론 그녀가 일을 할 때, 그리고 내가 수업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있었으니까 하루 종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틈나는 대로 각자의 일상을 공유했다. 아직 까지 일본어 휴대폰 자판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칼답은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꼼꼼하게 그녀의 메일에 답을 했다. 훗날 그녀는 그것을 두고 자기 할머니랑 메일을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만큼 진지하고 꼼꼼한 메일이라나 뭐라나.
 
나도 나 였지만, 그녀의 스케쥴도 엄청 바빴다. 거의 매일 출근을 해서 일을 했고, 발레를 가르치러 다니기도 했고, 따로 준비하는 자격증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나 역시 수업이 끝나면 일을 하러 가고, 공부를 하거나 했다. 주말에도 거의 풀로 알바를 잡아 뒀기 때문에 그녀가 사는 밥을 먹는 날이 생각보다 손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
 
내가 스포츠센터에 다니지 않으니까, 그녀와 우연하게 마주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 것이지만, 우리는 중간중간 서로 뭐하고 있냐고 묻기도 하고, 무언가 다른 것에 집중하다가 오랜만에 핸드폰을 열었을 때 표시되는 새 메일 표시를 보며 설레는 마음에 버튼을 누르기도 했다. 어느덧 꽤 친해져서, 이제 서로 말을 놓을 정도는 되었다.
 
-오빠. 이번주에 우리 동네에서 마쯔리가 있대!-
 
마쯔리란 일본의 지역 축제를 의미한다. 일본은 지역별로 그리고 시기별로 마쯔리가 있었는데, 아주 작은 마쯔리도 있었고, 규모가 큰, 테마가 있는 전통의 마쯔리도 많이 있었다. 보통의 축제는 길거리에 가득 포장마차가 생기고,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불꽃 놀이를 하기도 한다.
 
-그래? 언제 하는데?-
 
-금요일!-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이기는 했다. 항상 지역 축제가 있던 말던, 바깥에서 닭꼬치를 굽고 불꽃을 터트리던 말던 나는 방 책상 앞에서만 앉아 있었으니까. 나는 금요일의 스케쥴표를 잠시 보았다가, 이윽고 조금 용기를 내어 마리에게 메일을 썼다.
 
-그럼 나 밥 사준다는 거……그날 하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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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186넓은어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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