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만화방 좀 출입하고, 순정 만화 좀 봤다는 분들이라면 아마 이 만화의 제목쯤은 기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랑의 아랑훼즈>.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이 만화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 만화가의 이름을 달고 출판이 된 적도 있고, 원래 일본 배경인 만화를 프랑스로 배경을 옮겨 90년대 초반 해적판으로 발매가 된 적도 있다.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만화 중 가장 유명한 만화인 <사랑의 아랑훼즈> 작가, 그 사람이 바로 이번 편에 다룰 마키무라 사토루이다.
(c) Satoru Makimura
가끔, 아주 가끔 여자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심각한 고민을 해보곤 한다.
유난히 생리통이 심할 때, 배란일에 괜시리 가슴이 울렁거릴 때, 연애를 할 때, 혹은 결혼한 친구들의 푸념을 듣고 있을 때면 그런 의문은 커지고, 가지치기를 한다.
그럼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행복을 움켜잡을 수 있을까? 쉽게 이야기를 한다면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는 일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떤 남자랑 연애를 하고, 어떤 남자랑 결혼을 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되겠다.
위와 같은 질문에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자 자기가 살아온 경험에 비춰,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하여, 혹은 어떤 주의나 사상에 근거하여 대답을 하겠지만 사람의 인생이란 100명이 있으면 100명의 인생이 전부 다른데 어떻게 이렇게 살아야 행복한 인생이야, 라고 확답을 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자기가 생각한 것을 성심 성의껏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해, 라고...
마키무라 사토루의 만화는 여자로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이런 거라고 생각해, 라고 읽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그런 만화이다.
(c) Satoru Makimura
마키무라 사토루의 만화는 매우 여성 캐릭터 중심적이다.
‘여성적’이라는 단어가 딱 잘 어울리는 여자주인공들이 일을 하고, 연애를 하고, 인간 관계를 맺고, 스스로에 대해 고민을 한다. 특히 여자주인공들의 스스로에 대한 분석과 고민과 변화, 이것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자신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갈등하고 고민하고 그러면서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을, 새로운 자신을 움켜쥐는 마지막은 마치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우화(羽化)를 보는 듯 하다.
그래서 마키무라 사토루의 만화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연애가 아니다. 연애가 중요한 사건일지언정 전부는 아니다. 많은 순정 만화의 내용인 여자주인공의 연애 성취담과는 거리가 멀다. 연애는 여자주인공 인생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아니, 작가는 연애가 여성 인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이 없이, 자기 자신이 없이 관계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키무라 사토루가 그리는 연애는 굉장히 공감이 간다. 완벽한 선남선녀, 사랑스러운 여자 주인공과 여자들의 이상을 완벽하게 투영한 남자주인공은 나오지 않지만 나의 연애, 내 친구의 연애와 비슷하다. 연애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 연애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통, 상처를 이만큼 마음에 와 닿게 그린 만화도 드물다. 여자주인공의 연애가 이만큼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남녀 캐릭터들이 전부 구체적이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이매진 IMAGINE
(c) Satoru Makimura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해서, 내가- 결정했어….”
“가르쳐줄까-? 그게 난다는 거야.”
<이매진>의 마지막 권을 보고 난 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만화든 영화든 소설리든 가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보던 이야기가 멋진 끝맺음으로 마음 속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만화가 딱 그런 경우였다. 보고 나서 가슴이 차 오르고, 누군가에게 마구 이야기를 하고, 밤새도록 이 만화와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만화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여자 주인공 유우와 그녀의 어머니 미츠코이다. 건축 설계사로 자신의 회사를 갖고 있는 거침없고 당당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얌전한 바른 생활 아가씨 유우. 그리고 이 대조적인 두 사람이 사랑하는 남자 타나카와 토시히코. 미츠코와 토시히코의 관계는 어른스럽고 쿨하며 화려한 맛이 있어 만화를 보는 재미를 주고, 유우와 타나카의 관계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연애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매진 29 IMAGINE 29
(c) Satoru Makimura
“연애, 결혼 상대, 가정, 자식 혹은 회사에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않는 게 좋아요.
상대에 따라 자기 인생이 결정되는 사람은 절대로 되지 말 것.
그런 대상에서 깨끗이 손을 놓을 때 비로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실력이 생기는 거라구요.
의존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날수록,
자유로워지죠. 불안감이 줄어들어요.”
결혼이란 무엇일까. 꼭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한다면 언제, 누구와 해야하는 것일까.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하는 것일까. 가끔 우리는 결혼을 만 6세가 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이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 되면 하는 것, 혹은 해야하는 것. 왜 결혼을 하길 원하는지, 왜 결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연애 상대를 고를 때도 이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인가를 기준으로 고르고 있는 건 아닌지. <이매진 29>의 첫 부분은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이매진 29>에서 중심 인물은 시마코와 미노리, 두 자매이다.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사회에서 일반적이라고 칭하는 삶의 과정을 따르지 않으면 불안을 느끼는 언니 시마코, 그런 것을 누가 정했느냐, 그건은 내 인생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동생 미노리. 안정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하여 모험으로 끝나는 이 만화는 전작 <이매진>과 비슷한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 가벼운 소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맛있는 관계
(c) Satoru Makimura
<이매진>과 함께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맛있는 관계>는 <사랑의 아랑훼즈> 이후 잊고 있던 마키무라 사토루를 다시금 머리 속에 각인시킨 만화이다. 요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리만큼 적당함이라는 것이 중요한 게 있을까? 지나쳐서도 안되고, 모자라서도 안되며 무엇보다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 각각의 요리에는 각각 다른 최상의 재료와 타이밍과 조리법이 요구된다.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맛있는 요리는 되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화목한 가정에서 풍족하게 자란 모모에와 대조적인 여성 캐릭터 카나코, 미키, 그리고 상반된 매력을 가진 요리사 오다 케이시와 타카하시, 그 외에 다양한 캐릭터들이 맺는 관계들은 마치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만든 맛있는 요리 같다. 총 16권짜리 만화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8권까지 발매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세 작품 외에도 국내에 현재 정식으로 발매된 마키무라 사토루의 작품은 <사랑의 아랑훼즈>처럼 피겨 스케이팅을 소재로 삼은 <하얀 폴카>와 가장 최근작 중 하나인 이 있다.
여기서 모두가 궁금해할 것을 한 가지 밝힌다. 과연 이 만화들이 얼마나 야한가 하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리 야한 만화들은 아니다. 꼴림 문학관이라는 코너 이름이 참으로 무색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자세한 묘사가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불끄고 나니 참새 짹짹 우는 아침이었어요, 도 아니다. 섹스 또한 여자 주인공의 삶의 한 부분으로, 연애의 한 요소로 부드럽게 묘사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매진>의 당당하고 쿨한 성인 여성으로 묘사된 미츠코의 섹스관을 인용하면서 마키무라 사토루의 만화에 대한 소개는 마치고자 한다.
“섹스라는 건 말야. 오감을 풀가동해서 쓴단다. 지성과 야성, 교양과 센스와 인간성까지 모든 걸 총 동원해 알몸으로 1대 1로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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