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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모든 것 - 자궁과 보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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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더>
ㅣ어머니 죽어버리십시오며칠 전 TV에서 노인폭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다. 폭력의 주된 원인은 역시나 ‘부양비’였다. 노년층에 대한 사회복지는 고사하고, 일해서 돈 벌기조차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노인부양의 문제는 심심하면 떠들어대는 얄팍한 ‘충효사상’ 말고는 딱히 기댈 만한 무엇도 없는 상태다. 수많은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노인문제는 사회적 거세를 당하는 나이까지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문제라는 점에서 범사회적인 차원의 고민과 대책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젊은’이들과, 나이는 먹었으나 ‘노인’이 아닌 이들의 무관심 속에서 여전히 정체 중이다. 그나마 저출산 고령화 사회라는 선진국 형(!) 인구비례를 급작스레 이룩한 요즘에 와서야, 출산과 노년층 복지에 대한 정책들이 생겨나고 있지만,(이러다가 콘돔 값 확 올릴까봐 걱정이다) 이제야 시작하는 제도가 빛을 발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다. 한편, 이 뉴스에서는 노인폭력의 ‘주된 피해자와 가해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조사 결과 노인폭력을 가장 많이 저지르는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아들’이었다. 반면 그러한 폭력의 가장 많은 피해자는 이른바 ‘어머니’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많은 노인폭력의 형태가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폭력’이라는 이야기 일 것이다. ㅣ눈물 나는 모성의 일대기 아들들에게 어머니란 어떤 존재일까? 나 역시 누군가의 아들이지만 명쾌한 해답을 내리기는 힘들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엄마와의 관계를 설정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엄마 없이는 떡도 제대로 못 치는 반면, 누구는 엄마를 홍콩할매귀신쯤 되는 공포의 존재로 생각한다. 덕분에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그저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따위의 답변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야기를 좀 키워서 생각해보자. 각 개인들의 어머니를 넘어서 사회문화적인 ‘어머니’ 혹은 여자들의 공통된 성품이라 일컬어지는 ‘모성’(어머니의 성품)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어머니나 모성 따위의 단어를 TV등에서 접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집에 있는 우리 엄마라기보다는 자기희생과 헌신, 자식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시는 고향집 노모와 같은 이미지다. 하다못해 동물에 대해서까지도 ‘개미핥기의 경이로운 모성’ 따위의 제목(개미핥기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없다만)을 붙인 자연 다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와 같은 종류의 언설들, 어머니를 죽이고 심장을 꺼내가던 아들이 넘어지자, ‘애야 다치지 않았니?’라고 말을 걸었다는 그 공포스러운 심장의 일화, 자식을 위해서라면 싱하형이나 척 노리스와도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어머니’에 대한 찬양과 상찬은 기나긴 세월 동안 그리고 거의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이어 내려왔다. ㅣ어머니의 자궁 '세계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그림은 무성한 체모의 한가운데에 길게 갈라진 저 틈에서 모든 것이 나왔노라고 이야기한다.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단어는 굳이 정신분석학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일종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안에는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이 몸을 내맡길 수 있는 피안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생각, 그것이 어머니의 자궁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이다. 여성의 모성이 ‘본능’이 된 것도, 이 자궁에서 기원한다. 생명을 생성하고, 길러내는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궁에, 그 자궁에서 태어난 것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려는 성향이 함께 깃들어 있다는 생각. 나 역시 그 두 가지 성향이 전혀 연관성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생성, 돌봄, 헌신, 희생이라는 것에 대한 찬양의 뒤에 놓여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저 자신들의 기원에 대하여(남자들이)바치는 찬양일 뿐인 걸까? ㅣBaby Product Machine 모성을 본능이라는 형태로 여성들 곁에 매어두는 것은 곧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이다. 모성은 단지 자식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대하는 모든 사람(남자)를 돌보고, 그들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에서는 초등학생인 여자 캐릭터가 ‘여자는 모두에게 상냥해야 하는 거야!’라는 말을 하며 새로운 힘을 얻는다. 평상시 벌어지는 의사소통에서도 여성이 전투적이고, 도발적인 어조를 사용하는 것은 지탄받을 일이다. 싸울 때마저도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몰아세우지 않아야 한다는 식의 강박은 그것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내외부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다. 2차대전시기의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 이상적인 아리아 민족의 전형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하얀 피부와 금발,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잘생긴 독일 청년과, 어머니였다. 전쟁에 나가서 적과 싸울 건장한 청년들을 ‘생산’해내고, 그들이 전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고, 다친 이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헌신적인 ‘어머니’야 말로 나치가 찾아낸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다. 나치가 찬양한 어머니상은 여성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그네들의 더욱 확실한 종속을 위한 것이었다. 저출산이 확연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을 무렵, 어떤 이들은 ‘요즘 여자들은 이기적이라서 애를 안 나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자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사명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주 당연하게 ‘이기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은, 여성의 출산이라는 것, 나아가 여성의 몸이라는 것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조절되고, 이용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결핍을 타인의 종속과 착취로서 해결하려는 이 폭력적인 세계관이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자궁에의 찬양 속에 우회적으로 담겨 있다. ㅣ어머니의 보지 <마더>라는 영화가 있다. 병으로 골골대던 남편이 죽고, 자식들이 사는 런던으로 건너간 ‘엄마’의 이야기다. 아들과 딸이 기대하는 것은 엄마가 늘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삶에서 조용히 헌신해주는 것, 손자손녀들이나 봐주면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딸의 남자에게 자신을 ‘침실로’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그러한 일의 결과는 당연히 자신의 자궁이 아니라 보지를 드러낸 엄마에 대한 자식들의 ‘단죄’(추방)로 끝이 나지만,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엄마는 드디어 엄마에서 해방되어 떠난다. 자궁과 보지라는, 실은 정확하게 구분하기가 애매한 두 단어 사이에는 너무나도 커다란 간극이 있다. 어머니의 자궁과 어머니의 보지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띈다. 충격을 넘어서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일까?) 이 단어의 어머니는 돌봐주지도, 헌신하지도, 희생하지도 않는 어머니다. 엄마의 실체, ‘내’가 투사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엄마를 대하는 것은, ‘울고도 싶고, 보고도 싶은 그리운 내 어머니’와 전혀 다른 무엇이다. 실은 나조차도 하나의 삶의 주체로서의 엄마를 마주하는 것은 공포다. 그 덕에 나는 나를 돌봐주는 엄마의 피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려고 하며, 혹여 실체에 접근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기껏해야 설거지나 몇 번 해주는 것으로 생색을 내곤 한다. ㅣ강요되지 않는 돌봄을 위해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할 때, 여자아이들의 보지가 소중한 이유는 ‘아기집’이 있어서라고 가르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어머니성의 강요, 어머니이든, 어머니가 아니든 관계없이 행해지는 이러한 강요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실은 그러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사람들 역시 그러한 것이 제공되지 않았을 때는 제 손으로 밥도 한 끼 못 차려먹는, 아도르노 식으로 이야기하면 일종의 ‘퇴행’을 피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보살핌을 원하고, 돌봄을 원하고, 따뜻함을 원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누군가의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으로부터 나와야만 하는 걸까? 꼭 그것을 모성이라 이야기하고, 본능이라 이야기 하며, 그래야 한다고 몰아 붙여서 짜내야 하는 걸까? 회사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캔디주제가를 부르고, 수험생 아들을 위해 엄마의 정성을 담아 영양식을 챙기는 동안, 차츰 옅어만 지는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그들의 마음은 어떤 것으로 채워야 한단 말인가? 모성이라는 것을 찬찬히 뜯어보면 딱히 자궁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 ‘지금’을 사는 사람 중에 고갈되어가고 있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하려는 생각보다는, 상호의존적인 돌봄, 서로에 대한 서로의 돌봄을 생각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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