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있는' 섹스만이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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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루 발렌타인> ㅣ프롤로그 결혼 7년 차 어느 날 아내와 잠자리에서 도란도란 얘기할 때가 있었다. 아내는 얘기 도중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예전 연애할 땐 당신이 내 어깨를 이렇게 감싸기만 해도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한 느낌이 오구 밑에도 젖었는데, 훗... 이제는 애무를 아무리 해줘도 그때만큼은 아닌 것 같아. 이제는 영원히 그런 느낌은 오지 않는 걸까?” 나 역시 그러했기에 이 말에 전혀 서운한 맘이 깃들지 않았다. 다만 쓸쓸해졌다. 이제는 내 살처럼 느껴지는 아내의 몸뚱이는 나에게 더 이상 관능의 향취를 풍기지는 못한다. 아내에게나 나에게나 슬픈 일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와 아내를 결합시켜주었던 애정의 감정이 휘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혼 생활에서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시련을 극복한 만큼 애정의 나사는 더 조여졌다...고 나는 생각한다(아내의 입장에서는 모르겠다). 그렇다. 세월은 애정 속에 깃든 관능을 뺏어간 대신 확고한 유대감을 남겨준 것이다. 이제는 아내가 사라지면 나는 못살 것 같다. 나에게 결혼이 사랑의 무덤이라는 말은 틀렸다. 대신 관능의 무덤이라는 말은 지지하겠다. ㅣ사랑 있는 섹스 구성애와 같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도 원나잇의 시장판에 기웃거리는 청춘 남녀들 역시 섹스에 있어서 사랑을 우위로 두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 일치를 이루는 것 같다. 사랑의 미약 효과는 최음제를 능가해 보인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취하고, 손만 잡는 스킨십에도 짜릿한 전율로 몸서리를 친다. 하물며 섹스는 어떻겠는가? 별다른 테크닉을 발휘하지 않아도 알몸으로 뒤엉킨 사랑하는 이들의 성적 극치감은 오르가즘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 기간 동안의 섹스는 확실히 특별한 오르가즘을 선물 받지 않아도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정서적 만족감에 흠뻑 젖는다. 특히 사랑 있는 섹스는 자신을 성적 도구로서 이용된다는 의식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윤리적인 만족감도 충족된다. 이런 이유로 여성들에게 ‘사랑 있는 섹스’는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여자의 성적 쾌락을 죄책감으로 연결시키는 사회, 문화적 조건 때문에 ‘사랑’이라는 알리바이가 필요한 점도 있겠지만, 양육을 책임져줄 수컷을 붙들어야 하는 암컷의 입장에서 유래된 유전적 특질도 한 몫 거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해부학]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열정적 사랑의 유효 시간을 18개월에서 3년으로 잡았다. 그 다음은 따스하고 편안한 애착의 단계로 넘어간다고 한다. 1년 6개월... 이 말을 듣는 요즘 사람들의 반응이 재밌다. 그렇게나 길어? 어쨌든 사랑하는 연인 간의 폭풍 같은 열정적 사랑은 일생을 두고 보면 짧다. ‘사랑 있는 섹스’의 우월성을 옹호할 경우 그 ‘사랑’이 이런 짧고 열정적인 사랑에 국한된 얘기인지, 아니면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갖는 애착의 단계까지 포함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기서는 그 두 가지 단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사랑’의 의미를 규정하고 시작하겠다. 이제 ‘사랑이 있는 섹스’에 대한 찬성 논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사랑 있는 섹스는 인간적이다. 상대방을 성적 대상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전인격적으로 대한다. 따라서 정서적 만족감을 함께 얻을 수 있다. 사랑 없는 섹스는 관계 후에 짙은 공허감과 소외감을 가져다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 있는 섹스는 그럴 염려가 별로 없다. 둘째, 안정적이다. 새로운 하룻밤의 상대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 셋째, 쾌락적인 면에서도 우위를 점한다. 사랑은 지속적인 관계 속에 책임과 인간적 신뢰, 배려 등의 미덕을 지니게 되는데 이 때 상대의 성감대, 취향 등도 잘 알게 되므로 파트너의 만족감을 훨씬 더 잘 증진 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들을 하나씩 검토해보기 전에 먼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ㅣ‘사랑 있는’ 자들의 우울한 섹스 자화상 “남친과 관계를 가진지 어언 4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런데 관계를 하면서 만족할 만한 오르가즘을 느껴보지 못한 것 같아요. 남친이 오럴로 해줄 땐 한참이나 해야 겨우 느낄랑 말랑 하고 삽입한 채 남친과 같이 절정에 도달하고 싶은데...” “현재 남친과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데..그 사람은 삽입하고 3초도 못 가서 끝나버려요. 친구들은 절대 못산다고... 결혼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는데.. 결혼 생활에서 정말 명랑 생활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일까요? 심각합니다... 저는 지금 남친을 많이 좋아하는데.. 그것만 하고 나면 짜증이 나네요.“ “결혼한 지 10년인데, 남자라고는 오직 남편 밖에 모른다오. 결혼 전에 명랑을 맞춰볼 때는 그럭저럭 좋았는데, 결혼과 동시에 명랑이 싫어졌소. 명랑을 회피하는 나 때문에 고통 받는 남편도 안되었고, 내 인생에 남들이 다 하는 즐거움 하나가 없다는 것도 괴롭소. 오선생은 만나본 적도 없다오. 평생에 한번도 못 만나는 것이 아닌가 싶소.”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정말 필이고 뭐고, 두 번째 만나서 영화 보재서 비디오방 갔다가 결국 바지까지 벗겨지고 그냥 모텔 갔다. 그런데 그를 좋아한 것도 아닌데 그가 들어오자마자 막 전기 같은 게 오는 거다. 아마도 비디오방에서 흥분되어서 그런가 보다 했고 그는 애인도 있다고 해서 다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잊을 만하면 전화 오고 만나면 또 하게 되고.... 심지어 키스하는 것도 싫은데.....애무해주는 것도 싫었는데 막상 삽입하면 그냥 몸이 짜릿짜릿하는 것이다. 크기도 별루고 테크닉이 뛰어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횟수가 계속될수록 더 좋아지는 거다....” “흠.. 나두 그런데.. 4년 사귄 애인이 있죠... 난 이 사람이랑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나.. 아니었슴다.. 지금도, 그 사람 생각하면 살짝쿵.. 흥분되네여..ㅋㅋ 오래하든, 짧게 하든.. 그 사람과의 섹스는 넘 좋구 흥분되구... 호호호..” “남편을 사랑하오. 그러나 명랑에는 불만이오. 결혼 전 단 두 번 연애를 했는데 한 넘은 헤어졌고 두 번째가 남편이오. 지금 남편과는 사이가 참 좋소. 그러나 명랑은 거의 안 하오. 아이가 있어서 피곤하기도 하지만 사실 전 넘이 명랑을 너무 잘해서 남편과의 명랑은 힘든 거에 비해 소득이 안 느껴져서 그런 것 같소. 거의 6개월에 한번 하나? 둘 다 그런 쪽에는 무심한 편이라... 사실 난 안 무심한데 무심해지고 있다오. 생활의 기쁨이 줄어들고 잇는데 그냥 내버려둔 지가 근 3년 되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사이가 좋다오. 월 2회 정도의 여행과 늘 함께하는 시간~ 그러나 가끔은 화끈한 명랑을 하고 싶소“ ㅣ‘사랑 없는 섹스’를 사유하자. 내가 옮겨 놓은 보고서들은 ‘사랑 있는’ 자들에 한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배반과 불만으로 점철되어 있다. 일부러 그런 것만 골라 온 것이 아니다. 해피한 내용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의 없다. 하긴 행복한 자들이 아쉬울 게 뭐가 있어 굳이 게시판에 글을 올리겠는가. 어쨌든 당원들의 보고서는 ‘사랑 있는 섹스’의 우월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왜 현실은, 자명해 보이는 ‘사랑 있는 섹스’의 논거들을 배반하는 것일까? 아까 미루어놓았던 ‘사랑 있는 섹스’에 대한 논변의 타당성을 검증하면서 논해보자. 첫째, ‘사랑 있는 섹스’가 인간적이고 전인격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은 당위적 규범일 뿐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데서 오는 항상 참인 명제는 아니다. 오히려 ‘가정적인 남자’가 행하는 섹스의 무례함에서 오는 여성 파트너의 불쾌감도 상당수 보고된다. 때론 그런 무례함과 이기적 행동은 파트너와의 평소의 친밀성으로 은폐되거나 무마되어가는 경우가 많다. 또 사랑하는 이들의 섹스 모습이 ‘성적 대상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도 의심쩍다. 나이트 클럽에서 유혹한 파트너와 사랑하는 연인들 간의 섹스 행위 사이에 들어 있는 정욕과 육화(肉化)된 느낌에 있어 실제로 그 두 가지 경우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내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사실 러셀 바노이 말대로 인간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인간주의적 원칙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없이 섹스 행위를 관대하게 잘 수행할 것이다. 따라서 섹스에 인간주의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만의 독점물은 아닌 것이다. 둘째, ‘사랑 없는 섹스’는 섹스 후의 공허감이나, 소외된 느낌 등을 받을 수 있지만 ‘사랑 있는 섹스’는 정서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적을 수 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사랑의 관계는 일종의 책임감을 동반하기 때문에, 때론 본인이 원치 않지만 상대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다. 매춘을 제외하고 이때 만큼 소외된 섹스가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사랑 없는 섹스’는 상호 욕망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적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쾌락 뒤에 찾아오는 공허감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섹스 자체에서 기인한 느낌은 아닌 것 같다. 노래나 격렬한 춤 등 한판의 잔치가 파한 자리에 남는 그런 류의 공허함은 아닐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다시 떨어지는 그 낙차감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모멸감을 얻지 않는 한 우리가 반성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이는 상대의 취향을 잘 알게 되므로 성적 만족도를 높일 수 있으며 정서적 만족감으로 풍성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섹스라 할 지라도 원나잇에 그치지 않는 섹스 파트너와의 경우를 두고 본다면, 취향의 인지는 ‘사랑 있는 섹스’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어렵다. 또 낯선 이와의 섹스가 가져다 주는 모험과 스릴에서 비롯된 관능적 쾌감은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성적 만족도를 능가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오히려 사랑하는 이들의 섹스는 그 친숙함으로 인해 쾌락에 있어 한편의 약점도 발생하지 않을까? “당신이 애인에게 섹스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제 당신은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사랑하지 않은 사람과의 섹스에서 당신은 매번 당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러셀 바노이, [사랑이 없는 성]) 관능적 쾌락이 목적인 ‘사랑이 없는 섹스’는 그 섹스의 수단적 성격 때문에 정서적 공감대 형성에 소홀할 것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그에 따라 비인간적인 성격을 의심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섹스 파트너 간에도 순간적인 성적 해소만이 아니라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성욕은 인격, 지성 그리고 신체적 매력을 포함하여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통해서 발생한다. 따라서 ‘사랑 없는 섹스’가 친밀감이라든지 정서적 유대감을 배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네 정서는 가족보다 손님을 친절히 배려하는 생활의 태도를 알게 모르게 배여 있다. 친숙한 애인 또는 부부의 섹스보다 낯선 이와의 섹스에서 그런 배려심이 한층 더 작용하는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ㅣ마치며 지금까지 우리는 ‘사랑 있는 섹스’가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해 갖는 우월성 여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섹스 그 자체로 본다면 그 관능적 쾌락에 있어서 ‘사랑’이 기여하는 측면은 의외로 적다. 물론 ‘사랑’이 정서적 충만감을 제공할 수 있지만, 섹스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닐 터이다. 만일 섹스의 본령이 오르가즘을 비롯한 관능적 쾌락에 있고 그것을 커피라고 비유한다면, 사랑이 가져다 주는 정서적 충만감은 그 맛을 풍부하게 설탕이나 프림이라고 할 수 있다. 러셀 바노이의 비유를 좀 더 이어가자면 우리는 커피 본연의 향취만을 음미하기 위해서 블랙으로 마실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프림과 설탕을 첨가하여 그 맛을 풍부하게 감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두 취향의 가치 우월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있는 섹스’가 ‘사랑 없는 섹스’에 비해 도덕적 우위뿐만 아니라 쾌락의 우월성에도 항상 지지를 받는다. 컬티즌의 이영재 편집장의 문장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안전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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