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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에로영화 감독이 되었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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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에로영화 감독이 되었나 3▶ http://goo.gl/4zoqlt?


영화 <레드카펫>
 
뒤쳐질 수 있다는 불안감
 
그렇게 한참 정신 없이 <2X8 사춘기 이야기>의 조감독을 준비하던 때, 클릭 엔터테인먼트에서 한 신인 감독이 <태극기를 꽂으며>라는 쇼킹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허허... <태극기를 꽂으며>라니... 설마 이 태극기가 그 태극기? 제목 자체는 발칙하다만 그래봤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남자가 일본 여자들을 성적으로 정복하는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고 피식 웃어줬는데 대강의 줄거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DVD로 출시된 <깃발을 꽂으며>
 
<태극기를 꽂으며>(출시명은 <깃발을 꽂으며>)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호스트가 촛불시위에 참여했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길로 미군 사령관 부인과 부시의 아내를 덮친다는 이야기였다. 정치적 문제와 작품의 퀄리티에 대한 문제는 논외로 해두고, 일단 그런 컨셉의 작품이 기획, 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서두르지 않으면 영영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초조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이필립 감독이 ㄷ대 연극영화과 출신 조감독이 한 명 있다고 했었는데 그가 바로 <태극기를 꽂으며>로 2003년 초 대한민국을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린 공자관 감독이었다.)
 
이후의 진행 상황은 워낙에 시끌 법적했던 관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딴지일보 공자관 감독 인터뷰 참조) 결과적으로 상당히 실망스러운 기승전결을 가진 해프닝이 되버렸지만 에로비디오로 뭔가를 시도하려 했던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내 나이 또래의 연극영화과 출신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다른 이에게 뒤쳐졌다는 불안감과 함께, 프로젝트의 야심찬 스케일에서 받은 감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난 비디오 자켓 촬영을 하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비디오 자켓 촬영
 
감독이 적어준 약도에 표시된 곳에 주위를 몇 번 돌았는데도 ㅇㅇ스튜디오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는데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여기 도착하긴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ㅇㅇ스튜디오 간판은 없는데요?"
 
"못 찾겠지?"
 
"네. 아무래도 약도가 잘못 된 것 같아요."
 
"맞아. 잘못 됐어. 그 반대편으로 와야 돼."

"어쩐지... 금방 갈께요."
 
"아니. 오지 말고 청담동 사거리 있지? 주유소 앞에."
 
"네."
 
"거기서 여 배우 픽업해서 와."
 
"여배우 누구요?"
 
"박희수. 우리 주연 배우."
 
드디어 주연 여 배우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여비서 스타킹> 표지 속 배우 박희수
 
사진으로만 봤지만 실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어떻게 인사를 해야 되는지, 내 소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는데 횡단보도 맞은 편에서 낯익은 미소녀 한 명이 펑퍼짐한 청바지를 입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확실히 배우는 배우였다. 꽤 먼 거리였지만 얼굴 전체에서 특유의 광채가 나서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내가 자기를 픽업하러 나왔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조감독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근데 스튜디오가 어디예요? 못 찾겠어!"
 
살짝 짜증이 난 그녀를 데리고 감독이 다시 일러준 스튜디오로 향했다. 얼마 안 되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분장 언니와 핸드폰으로 이런 저런 얘기하는 걸 들어 보니 일본 미소녀 스타일의 첫인상과는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털털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유명 명품 브랜드 매장이 위치한 건물 지하로 내려갔는데 이미 대부분의 매니저와 스텝들이 도착해 있었다. 스튜디오 사장으로 보이는 사진 작가가 조수와 함께 이리 저리 조명 세팅을 하고 있었고, 스텝들끼리는 이미 안면이 있는 듯 매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보아하니 회사에서 자켓 촬영 진행을 담당하는 홍보실장도 와 있는 것 같았는데 정작 감독이 오지 않아 조감독인 나는 당장 뭘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밖에서 기다려야겠다 싶어 나가려는데 마침 감독이 들어왔다. 감독은 스튜디오로 들어온 후 스텝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나도 감독의 소개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는 사이 스튜디어 한 쪽 구석에 말 없이 앉아 있던 참한 인상의 홍보실장이 천천히 걸어 왔다.
 
"감독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여긴 조감독입니다. 인사드려. 최 실장님이야."
 
"안녕하세요. 조감독입니다."

"네, 잘 부탁드릴께요. 근데 자켓 촬영 컨셉은 잡아 오셨어요?"
 
"아니요."
 
"그럼 이건 어떠세요?"
 
홍보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방에서 주섬주섬 잡지에서 오려낸 듯 보이는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좋은데요? 이걸로 가죠.:
 
잠시 후 몇 장의 사진을 사진 작가에게 보여준 후 촬영 컨셉에 대해 회의를 시작했고 바로 배우를 불러 촬영에 들어갔다. 별 다른 소품도 없이 그냥 스튜디오에 있던 가구들과 소품들을 이용해서 세팅을 한 후 촬영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평소 연구하고 있던 일본 성인 비디오 자켓 사진들과 자연스레 비교가 되었다.
 
 
일본 우수 성인 비디오 제작사들인 moodyz, madonna, ruby 등에서 제작되는 예술적인 수준의 자켓 디자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촬영한다는 건 나의 장인 정신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력의 빈곤 그 자체였다.
내가 해도 이거 보다는 잘 할 수 있겠다 싶어 많이 답답했는데 지금은 조감독의 본분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매니저들과 의상, 헤어, 분장 스텝에게(의상, 헤어, 분장 세 파트를 한 명이 담당) 극영화에서 하던 그대로 의상 연결표와 촬영 일정표 등을 나누어 주었다. 매니저들과 스텝들은 내가 나누어 준 문서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이 문서를 업계 표준으로 정한 후 제작사들에게 쫙 돌려야 한다며 흥분하고 있었다.
 
"와... 진짜 잘 만드셨네요."
 
"네?"
 
"여기 적힌 대로만 준비하면 되는 거죠?"
 
"그래주시면 고맙죠."
 
의상, 분장, 헤어를 맡은 분이 특별히 더 좋아하는 눈치였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일반적인 비디오 제작 현장에서는 이런 의상 연결표나 시간 단위로 구분되어 있는 촬영 일정표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시나리오 없이 줄거리만 몇 줄 적힌 종이 몇 장만 갖고 촬영을 진행하는 현장도 있다고 한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나로서는 조금 오바를 한 셈인데 잘했다고 칭찬해주니 기분은 좋았다.
 
한참을 칭찬을 듣고는 별 다른 할 일이 없어서 스텝들 간식을 사러 나갔다 왔는데 스튜디오 분위기가 조금 싸늘해져 있었다. 자존심 쎄 보이는 사진 작가 아저씨가 혼자 씩씩 거리고 있었고 감독은 역시나 잔뜩 삐진 듯 보이는 여배우에게 가서 뭔가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여배우는 왼쪽 얼굴이 더 이쁘다고 생각해서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찍어달라고 했는데 사진 작가는 오른쪽에서 찍으려고 해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별 일이 다 있다 싶었는데 성깔 좀 있어 보이는 사진 작가는 결국 주연 배우를 빼고 촬영을 진행했다. 저러다 화해하고 다시 촬영에 임할 줄 알았는데 여 배우는 끝까지 화를 풀지 않았고 사진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냉랭해진 분위기를 살려본다고 감독이 직접 나서 "이런 포즈로도 찍어주세요"하면서 직접 민망한 포즈를 취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비디오 자켓에 메인 여 배우 사진이 빠진 상태로 출시가 되는 당황스러운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반면에 조연 여배우 '지나'는 작가의 의도대로 열심히 포즈도 취해주고 상냥하고 친절해 스튜디오의 분위기를 제법 살려 주었는데 결국 그녀가 비디오 자켓의 주인공이 되었다.
 
촬영이 끝나고 감독과 홍보실장을 따라 저녁을 먹으러 스튜디어 근처의 곰탕 집으로 갔다. 그제서야 그녀와 정식으로 인사를 했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에로비디오 제작사 홍보실장답게 식사 내내 업계에 떠도는 다양한 소문과 유명 인사들에 대한 이런 저런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해 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의 사생활과 명예에 관한 내용이라 차마 공개할 수 없어 조금 안타깝다.) 얘기를 듣는 내내 "와~' '진짜요?" "싸나이네요" "최고다" 따위의 감탄사만 남발했던 기억이 난다.
 
 
한 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드디어 촬영 당일, 전날 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와 다방으로 달려갔다. 다방 사장님 할머니를 깨워 문을 연 뒤, 난로를 켜 놓았다. 다방 안이 어느 정도 따뜻하게 덥혀지자 졸음이 쏟아졌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깜깜했던 하늘이 지평선 끝에서부터 서서히 투명한 파란색으로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무슨 문제라도 생기지는 않을까 싶어 잠도 제대로 못자고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하고 나니 전날 느꼈던 불안, 초조함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고 빨리 촬영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에로비디오 조감독이라는 타이틀에 자신이 없어 잔머리를 굴리고 온갖 고민을 하며 망설였던 과거의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질만큼 상쾌한 기분이었다.
 
"영화를 찍고 싶으면 그냥 찍으면 될 것을 무슨 고민과 걱정을 그렇게 많이 한 건지..."
 
다방 입구에 선 채 잔뜩 폼을 잡고 있는 사이에 스텝들의 차가 하나 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나는 어떻게 에로영화 되었나 5▶ http://goo.gl/3eCqOt


글쓴이ㅣ에로영진공 위원 최경진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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