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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예술] 아버지는 딸을 소유하고 딸은 아버지를 유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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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antonio Franceschini, [Lot and his Daughters] 1676
> 근친혼의 전통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이집트의 고대 왕실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소왕국에서 근친혼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유럽의 왕실에서도 근친과의 혼인이 장려되거나 근친 외의 혼인이 금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 왕실 혼사에서 근친혼의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초기까지도 이 전통은 계속되었다. 물론 역사 속에 전해지는 근친혼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선민사상에 기반한 것이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근친혼을 근친애와 같은 의미로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근친애의 욕망은 무엇인가, 근친에게 느끼는 성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답을 내릴 자신은 없지만, 이 욕망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환상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쉽게 소유할 수 있는, 이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성욕을 롯과 그의 두 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미술작품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John Martin [Destruction of Sodom and Gomorrah]
> 구약시대의 규범집 레위기에는 근친혼 또는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내용이 전해진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여성에 대한 소유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내용으로는 '누구든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20:11) '누구든지 그의 며느리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이라 그들의 피가 자기들에게로 돌아가리라'(20:12)와 같은 말씀이 있으며, 형제 사이의 근친상간에 대해서도 '네 아버지의 아내가 네 아버지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18:11)라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복잡한 족내혼의 관계에 대해서도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하지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데려다가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살붙이이니 이는 악행이니라'(18:17)라고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레위기 이전에 일어난 근친혼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의로운 사람이 단 열 명도 없는 타락의 도시 소돔에 천사들이 찾아왔는데 천사를 알아본 롯은 그들을 접대하였다. 천사들이 롯에게 하나님이 이 땅에 저주를 내렸으니 도망가라고 하자, 롯은 아내와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와 작은 도시 소알로 갔다. 천사들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나 롯의 아내는 유황불이 떨어지는 소돔과 고모라를 돌아보다 그만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창세기 19:1-29) 아내를 잃은 롯이 두 딸과 섹스하게 되는 과정은 성경본문에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롯은 소알에서 그 고장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두려워 두 딸을 데리고 소알에서 나와 산에 들어 가 살게 되었다. 그는 두 딸과 함께 굴 속에서 살았다. 하루는 언니가 아우에게 말하였다. '아버지는 늙어가고, 이 땅에는 우리가 세상의 풍속대로 시집갈 남자가 없구나. 그러니 아버지께 술을 취하도록 대접한 뒤에 우리가 아버지 자리에 들어 아버지의 씨라도 받도록 하자.' 그 날 밤, 그들은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고는 언니가 아버지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언제 들어 왔다가 언제 일어나 나갔는지 통 몰랐다. 그 이튿날 언니가 아우에게 말하였다. '간밤에는 내가 아버지 자리에 들었으니 오늘은 네 차례다. 아버지께 술을 대접하고 자리에 들어라. 같이 아버지 씨를 받자.' 그들은 그 날 밤에도 아버지에게 술을 대접하고 이번에는 아우가 아버지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언제 들어 왔다가 언제 일어나 나갔는지 통 몰랐다. 이리하여 롯의 두 딸은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창세기 19:30-36) Jan Massys (or Metsys) [Lot and his Daughters] c.1565
이 이야기는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두 처녀가 아버지를 유혹하여 씨를 받았으며 아버지는 술에 취해 딸이 들어왔다 나간 줄도 몰랐다는 설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와가 아담을 유혹했듯이 이번에도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였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성경 저자의 변명에는 일관성이 있다. 또한 성서는 지속적으로 소유의 문제를 일깨워준다.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전적으로 종속적이었다. 악한 사람들이 저주 받은 도시에 찾아온 천사들을 해치려고 하자, 유일하게 의로운 사람 롯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시다시피 나에게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딸이 둘 있소. 그 아이들을 당신들에게 내어줄 터이니 마음대로 하시오.'(창세기19:8) 이 두 딸은 약혼한 상황이었지만, 그녀들의 섹스에 대한 결정권은 여전히 아버지의 것이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딸을 소유하고 있으며, 딸은 아버지를 유혹한다는 점이 성경 속 근친애의 첫번째 환상이다. 선한 사람 롯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딸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심지어 딸들이 이틀에 걸쳐 자신의 아랫도리를 벗겼다는 점을 알지도 못했다. 물론 두 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데 결혼하여 자손을 퍼트릴만한 다른 남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 남성 매저키스트의 소유당하고자 하는 욕망은 진정한 의미의 소유당함이 아니라, 주인의 역할을 수행해주는 노예와 같은 존재를 설정해 둔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6 팜므파탈 환타지와 여성의 실재) 마찬가지로 남성의 사디스트 욕망, 대상에 대한 소유욕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가 몇 가지 있다. 아버지가 딸과 동침하는 장면이 표면적으로 올바른 것이기 위해서, (마치 매저키스트와 같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딸의 의지로 동침하게 된 것이라는 변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주제를 딸의 입장에서 다시 본다면 어떨까? Orazio Gentileschi [Lot and his Daughters] 1563-1639
Orazio Gentileschi [Lot and his Daughters] 1622
오라지오 젠틸레스키의 작품 속에서 롯과 두 딸은 (근대적 의미에서) 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늙고 지친 아버지는 딸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고 딸들은 저 멀리 불타는 소돔을 바라보며 근심하고 있다. 이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파멸로부터 도망친 이들에게 어떤 희망도 남아있지 않다. 이들 '가족'은 함께 공포에 떨고 함께 절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이후를 묘사한 여느 남성 작가들의 그림은 상당히 에로틱하다. 죽음으로 얼룩진 정신적 공황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해낸 것인지, 아래 작품에 묘사된 롯과 두 딸은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는 것 같다. 알몸으로 술을 마시며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언뜻 보기에 정사장면을 묘사한 평범한 그림과 다를 바가 없다. 화면 속의 남성이 늙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Albrecht Altdorfer [Lot and his Daughters] 1537
Hendrick Goltzius [Lot and his Daughters] 1616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근친상간에 대한 남성의 환상을 엿볼 수 있다. 마치 늙은 바쿠스가 젊은 여성들과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아버지가 딸에게 느끼는 성애는 다른 여느 여성에게 느끼는 성애와는 다른 점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여성과 관계하고자 한다. 어쨌든 자신의 소유물인 여성과의 성관계는 이 주제가 터부시될수록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 아버지의 욕망이 반영된 또 다른 주제로 로마인의 자비(Roman Charity)를 들 수 있다. 로마인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갖혀 아사형(餓死刑)을 받았다. 그의 딸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감옥으로 갔다. 어떠한 음식물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지만, 딸은 자신의 젖가슴을 꺼내 아버지를 먹여살린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랑, 헌신적인 애정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이 주제를 표현한 그림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 Peter Paul Rubens [Roman Charity] 1630
Carlo Francesco Nuvolone [Roman Charity] 1662
정말 굶주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딸의 품에 안겨 젖가슴을 빠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떠한 종류의 에로틱한 분위기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이미지에서 굶어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젖을 빠는 배고픈 남성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은밀한 분위기는 아사형을 받은 범죄자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어쨌든 근친애에 대한 남성적 환상은 이런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딸과 육체적으로 접촉하게 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이 이야기에서 딸은 마치 어머니 같이 젖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편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성적 환타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아버지-딸의 근친애와는 다른 종류의 욕망을 통해 소유의 문제를 확장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아버지와 딸의 근친애를 주제로 하는 이미지의 선정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의 [서양미술의 섹슈얼리티]를 참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근친애를 바라보는 관점이 남성중심적인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번 칼럼은, '알트도르퍼의 작품에서 가정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거나, 로마인의 자비를 통해 '성적 솜씨는 나이가 들어도 시들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유머러스한 언급에 대한 반론일 수도 있다. * 성서 역본은 개역개정과 공동번역 성서를 선택했다. 다른 판본의 번역을 읽어보고 싶으면 대한성서공회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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