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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화] 제11탄 그늘에 핀 애욕전선 - 그남자 그여자의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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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자를 일반사람으로 빗대서 스스로를 이반이라 일컫는 동성애자들에게도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와 맞먹는 러브러브의 역사가 있다 하여 선조들의 동성애 역사를 살펴보면은 기록에 언급된 최초의 동성애자(또는 성적소수자)는 아마 신라 제 36대왕 혜공왕 일 것이다. 그는 경덕왕의 적자로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태종 무열왕의 직계손으로는 마지막 임금이다.

김부식 옹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후가 초기에 섭정했다고 한다. 유별난 어머니와 권위의 부담감으로 게이가 될 후천적 요인을 타고난 것이다. 평소 여자 같이 행동하고 옷 입기를 즐기는 드랙 퀸(여장남자) 놀이를 즐겼단다.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빌어 왕이 됐으니, 나라에 불길하다고 하여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은 여자같이 행동해서 근엄한 왕이 해괴해보여서 죽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당시 신라왕실이나 조정은 왕이 동성애자인 건 개인의 취향이라 생각하는 쿨 한 집단이었던 것이다. 뭐 장보고와 같은 지방 호주들과 귀족들의 중앙집권에 대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게 맞는 말 일게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비운의 동성애자 임금은 또 있는데, 혜공왕과 비슷한 말로를 보여준 고려시대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몽고출신의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동성애에 눈을 떠, 자제위라는 궁정 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시체놀이와 애널킬러 놀이를 즐겼다. 사비를 들여 호스트바를 궁내에 차린 것이다. 그러다 후궁 익비와 사통한 홍륜의 계략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사실 자제 위는 순전히 왕의 욕망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쁨조만이 아니라 요즘 다모에도 자주 나오는 비호대같은 “게이 비호대” 조직이었다고나 할까? 미와 무예를 갖춘 집단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리 예술적 재능도 뛰어 났던 개혁군주 공민왕은 어이없게도 자신이 쓰다듬어 준 한 청년의 손에, 술에 곯아 떨어진 채 침실에서 비명횡사하고 만다. 외부의 적은 미남계를 써서 왕을 간단히 암살하고 말았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이반~

한편 레즈비언에 대한 기록도 찾아보면 조선실록에 세종 때 세자빈 봉 씨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세자의 처사에 분개하여, 후궁들과 7 년 동안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대담하기도 하지.


기실은 세자가 돌보지 않아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행위였다기보다 이쁜 궁녀들과 노는 것이 수염 보숭보숭한 세자눔보다 재미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레즈비언적 행위였으며. 그녀의 그러한 취향이 도리어 세자를 멀리 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성간의 사랑이 궁정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세속오계로 정신을 무장한 화랑대도 있었다.

지금도 군대에서 성 추행이 흔한데, 꽃 미남 집단이었던 화랑대는 오죽했으랴… 이곳에서는 성 추행보다는 자발적 발라당, 내지는 자발적 자지러짐이었다는 게 차이일 것이다.

과녁의 화살 다 맞추면 최고 꽃 미남의 밤 서비스가 기다리는 두근두근한 집단생활이 아니 었을까나? 이외에도 유랑 예인 집단 남사당과 그 외 승방과 머슴사이에서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의 사랑 얘기는 많이 전해진다.

TV도 없던 시절 그 기나긴 밤 꽃 뱀 걱정 없이 밤새 콩닥 쿵덕 했을 행랑채 머슴 왕 이는 요즘에 비하면 진짜 행복한 동성애자였을지도 모르겠다.
팍시러브
대한여성오르가즘운동본부
 
· 주요태그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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