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선택의 기회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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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don jon] 먼저 주장해 보자. “포르노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유사이래, ‘성’이라고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쾌락의 추구는 그것을 규제하는 사회의 공적정책과 대립하며 항상 첨예한 전선을 형성해왔다. ‘성’ 또는 ‘성행위’가 개개인의 삶에서 더없이 중요한 영역이지만, 그러한 개인들을 통제해야 하는 사회로서는 ‘가’와 ‘불가’의 영역을 구분 짓는 것이 필요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사회는 새로운 성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개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부딪히면서 스스로 완충장치를 만들어 나가고 더디게나마 그 영역을 확대해 가는 단계를 거쳐왔다. 사적쾌락의 규제와 허용의 범위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물이며 한 사회가 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문화적 성숙도의 현주소이다. 포르노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제외한다면, 포르노 합법화의 주장이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될 문제는 그러한 문화적 수용의 한계치에 대한 것이다. 우리사회의 성문화가 아직 포르노를 수용할 만큼의 맷집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성문화의 단계는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것일까. 영화 <죽어도 좋아>가 재심의까지 거치면서 실제적으로 개봉불가와 다름없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본격적인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 <로드무비>는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고 당당히 개봉관에 입성했다. 우리 문화가 동성애를 큰 충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황혼의 성’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으로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러한 소재가 공론의 장으로 진출했다는 정도의 의미는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죽어도 좋아>의 심의 과정에서 오고간 얘기들을 들어보자면 그러한 판단이 순진 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죽어도 좋아>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바로 ‘성기’의 노출이었다. <로드무비>의 경우 실제로 필자가 몇 달 전 기술시사회에서 보았을 땐 적나라한 동성애 성교장면과 잦은 성기 노출에 충격을 받았었다. 물론 심의 전에 자기검열을 통해 이 장면들을 꽤 많이 편집했으리라 짐작이 간다.(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보지 못했으므로 짐작만 해본다) 심의 과정에서 두 영화의 갈림은 성기노출의 유무가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가정은 지나친 과장일까. 결국 뭐든 다 해도 좋지만 성기만은 안 된다는 논리는 성행위 묘사의 수용범위를 성기자체에만 의존하는 지극히 편협하고 원시적인 성문화의 토양을 보여준다. 구강성교의 한 장면에서 살짝 지나가는 성기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는 후진성을 아직도 극복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점진적으로 성문화에 관대해지고 있다는 가정을 해 보면서도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 도대체 우리의 단계가 어디쯤인지를 규정하기가 참으로 애매해진다. 상황이 이럴진대 화면처리는 커녕 성기와 삽입자체를 대놓고 드러내는 포르노의 합법화를 논한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처지이다. 영화는 작가주의라는 변명이라도 있지만 포르노는 성행위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기에 본질적으로 규제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포르노가 갖는 성격상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서 허하는 성-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여기에선 합법적인 부부간의 동침에서 비롯되는, 재생산을 목적으로 한 성으로 한정하고자 한다-에서 벗어난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데에 사회의 포용력의 발휘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단계’를 무시하고서라도 포르노의 합법화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후의 단계가 성기까지인가 동성애까지인가 하는 소비적인 논점에서 벗어나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성문화의 성숙을 채근해야 할 필요성에서이다. 사적 쾌락에 대해 국가 또는 사회가 규제의 대상과 범위를 정하는 가장 큰 기준은 ‘공익’과 ‘윤리적 기준’일 것이다. ‘공익’의 관점에서 보자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우리 사회는 포르노그라피를 유해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성문화에 수많은 변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항시 의혹의 눈으로 성을 바라본다. 공익성을 해치는 여타의 일들은 그 위해가 드러나야만 규제가 적용되지만 성은 그 반대로 무해함이 입증될 때까지 죄악의 혐의를 갖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생각해 보자. 누군가 자신의 방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할 경우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은 무엇일까? 드러내놓기 거북한 자신의 성적 취향을 개인적으로 탐닉하고 있을 때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사회는 포르노를 소비하는 개개인들이 난교나 관음증, 동성애, 새디즘이나 마조히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일까. 폭력성을 보여주는 영화가 개개인의 폭력을 조장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정설이 된지 오래다. 포르노그라피가 개개인의 성적일탈을 조장하리라는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소비행위가 음성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을 때, 포르노 소비자는 처음부터 범법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는 결과가 되며, 그들을 도덕적 불구자로 만들어버린다. 유해하다고 짐작되는 행위나 환상을 억압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위해한 힘만 강화될 뿐이다. 또한 사회가 구성원의 보호를 목적으로 개개인의 일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공익을 넘어선 억압으로 다가올 것이 당연하다. 또 하나의 잣대인 ‘윤리적 기준’을 보자. 그것이 갖고 있는 논리적 근거는 무엇일까. 규제의 논리를 설파하는 입장에서 자주 들고 나오는 장치는 ‘상식’과 ‘사회적 합의’이다. 상식은 매우 정치적인 개념이다. 상식을 거론하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비상식’을 구분 짓기 위해 억지로 끌어다 쓰는 용어일 뿐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규제한다는 것은 이미 그 바깥 범주를 비상식이라 규정한 채 상식이 마치 사회적 합의에 이른 지고지순한 기준인 마냥 들이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회적 합의?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성의 영역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어떠한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것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증명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현재의 공적 규제가 상식과 사회적 합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옳은 기준일 수만은 없다. 상대적으로 성문화에 있어 개방적이고 각종 포르노그라피의 합법화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던 서유럽 국가들이 난교와 비상식이 날뛰는 소돔이 되었는가?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우리사회가 문제시하고 있는 성적 소비행위를 적극적으로 규제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정부는 사창-공창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법적 테두리 안으로 껴안는 것은 부담스러워 한다.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포르노그라피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을 생각도 없다. 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규제의 장치를 견고히 했을 때 초래할 저항이나 반대로 규제를 풀었을 때 터져 나오는 욕구 모두가 사회의 근간을 허물어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규제라는 것은 이러한 양자의 위험을 교묘히 피하는 줄타기를 하고 있을 뿐이며 결국은 어떠한 권력관계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다. 성적 영역의 규제에 있어 사회가 취하는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그 규제의 논리적 근거로 작용하는 공익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실한 것이며, 규제 자체가 사회적 합의를 통한 윤리적 기준 위에 서 있다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인 것임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성적 개방의 폭을 넓히려는 논의에서 유해, 무해 또는 윤리적 기준의 허실에 얽매이는 것은 자칫 규제를 합리화하려는 의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일정 수준의 양보와 타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논의는 또 다시 새로운 단계로의 공적 규제의 자리이동만을 가져올 뿐이다. 더욱이 규제와 수용의 전선에서 양자가 어떤 절대적인 공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개인이나 사회의 정체성을 이미 주어진 어떤 확실성의 세계에 고정시키게 된다. 결국 그것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는 사회적, 도덕적 변화에 더디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쾌락과 공익의 본질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개인의 선택을 의미있게 하는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즉 절대적 가치에 바탕을 둔 도덕이 아니라, 개인이 타인의 다양한 선택과 공존할 수 있고, 스스로 행위의 의미를 고려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영화 [죽어도 좋아] 나는 <죽어도 좋아>를 보고 싶지만 볼 수가 없다. 그들은 그것이 유해하다고 판결했지만 나는 유해한지 무해한지 판단할 근거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포르노를 즐기거나 혹은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성문화의 성숙은 그러한 ‘선택을 표명할 자유’를 수용하는 쪽으로 진행되어야만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님에 분명하다. 사회가 규제와 허용의 범위를 정확히 일러주고, 그럼으로써 곤혹스러운 개인적 선택의 수고를 피하는 게 훨씬 속편한 일인지도 모른다. 공적 규제가 갖는 힘은 그러한 개인의 약한 고리를 철저하게 이용할 줄 안다는 것에 있다. 어쩌면 그것이 갖는 정당성을 우리 스스로가 부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중요한 지점은 쾌락이라는 목표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힘에 굴복하지도 않는, 그리고 그것을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는 개인에 대한 믿음이다. 다시 주장해 보자. “포르노를 볼 수 있게 해달라”가 아니라 “포르노를 선택할 기회를 달라”이다. 규제는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의 산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작동하는 힘을 갖게된다. <죽어도 좋아>의 심의 과정에서 불가를 표명했던 위원들이 하나같이 논거로 들었던 것은 성기나 체모노출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등급위원회의 기준이었다. ‘내용은 충분히 수긍하지만...’등의 수식어를 갖다 붙이더라도 결국 기준은 그것이지 않느냐는 결론이다. 행위 그 자체보다는 행위의 맥락과 의미를 고려해 보려는 노력은 결국 그 명시적 기준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포르노 합법화라는 문제가 거쳐야할 그 험난한 과정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라 믿는 당신의 쾌락이 실제로는 길들여져 왔음을 느낄 때, 그리고 당신이 다른 여타의 선택의 기회를 박탈 당했음을 깨달을 때, 당신 역시 그 첨예한 전선에 서 있다는 것이다. P.S : 위 글에서 포르노라는 그 장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 문제는 논외로 삼았다. 포르노가 일반적으로 여성을 종속적으로 표현하고 남성폭력을 대변하는, 성차별주의적 사회의 반영일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적영역을 확대한다는 문제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다. 문화적 수용이 결코 특정한 생산-소비행위의 무분별한 방임과 병치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으로만 정리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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