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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에로비디오 대여, 그 소리없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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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는 문화의 장이었던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드랬다. 당시 에로비디오를 대여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쳐야 했던 역사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8-90년대. 총성없는 눈치의 전장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비됴 대여점에서 에로영화라 하는 것들을 빌려보았을때 초장부터 약간의 긴장과 신경전을 거쳐야만 했다. 영화소비의 불손(?)한 의도 - 이는 사회적인 평가가 그렇다는 것인지 필자의 의견이 아님을 밝힌다- 에 있어서 사람인지라 뭔가 켕기는 마음을 쉬이 감추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에로영화라 함은 절대적인 장르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이 갖는 몇 가지 특징의 총화로서 지칭하는 바이다. 그 특징이라는 것이 필름이나 촬영상의 허접성, 스토리 전개의 투박함, 그리고 거의 법칙이라 할만큼 주기적인 노출씬 등을 들 수 있겠다. 허나 요즘은 제목 하나로도 그 장르를 구분할 수 있다는 평자도 있다. 각설하고.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애초부터 에로영화를 목표로 비됴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겐 몇 가지 유형, 조금 유식한 말로 패턴이 있음직하다. 비록 필자가 비됴점에서 일하는 전문인이 아니고, 그렇다고 뻔질나게 그 쪽을 소비하는 내공의 소유자도 아니기에 얄팍한 소견일 수 있겠으나 재미 삼아 그 몇 가지 유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성동격서 (聲東擊西) - 서쪽을 치려거든 동쪽에서 소리를 내라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던가. 그들은 절대 목표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들지 않는다. 일단 신규프로 코너를 한번 쭉 훑어보고 그 중 몇 가지를 고르는 척 해본다. 당근 재미없겠다는 듯 다시 집어넣지만. 이것은 일종의 과시효과를 노린다기 보다는 - 실제로 그런 행동을 유심히 지켜볼 사람도 없다 - 거사를 실행하기 앞서 거는 자기 최면이나 워밍업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다. 널찍하고 비까번쩍한 요즘의 대여점들은 빨간 코너를 구석에 배치하고 진열대를 통해 뭍 사람들의 시야를 가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본디 대자본의 상술에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필자이지만 그러한 서비스의 평온함을 맛볼 때면 녹아들고 만다. 욕구의 밑바닥까지 끄집어 내 장사할 생각이면 그 정도는 해야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만화까지 곁들어 진열대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동네의 영세한 대여점에서 그러한 공간적 서비스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오로지 내 목표는 이거요라며 최단코스로 땡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내공이 부러울 뿐이다. 2. 좌불안석 (左不安席) -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말라 그들은 결코 그 자리, 그러니까 야시시한 제목들이 즐비한 그 자리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 한눈에 제목들을 스캔하여 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고 맘에 드는 제목을 골라낸다. 본디 영세 대여점이라는 곳에선 좁은 통로를 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부딪혀야 하는 것. 오래 머물수록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고 자신의 판단력이 흐트러지게 된다. 한번에 목표물을 찾지 못하면 다시 신규 코너로 가서 호흡을 가다듬고 재도전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간혹 스쳐 지나가는 듯하면서 정확히 목표물을 찾아 순식간에 빼 가는 능력자나 아예 면벽좌정하고 하나하나 내용물을 들춰보는 내공의 소유자를 보기도 한다. 그들의 기량을 흠모하면서도 나 역시 따가운 눈총으로 그들을 훑어봤던 이중성을 고백하는 바이다. 3. 호사유피(虎死留皮) - 호랑이는 껍질을 남기고 비됴는 껍데기를 남긴다 초보자가 아니라면 카운터에 비됴를 들고 갈 때 결코 껍데기 채 들고 가진 않는다. 그 요란한 비됴 껍데기는 벗겨서 얌전히 놓아두고 (이때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가진자는 껍데기를 거꾸로 놓아두는 것도 까먹지 않는다) 알맹이만 카운터로 가져간다. 그리고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제목의 선별에 있어서도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같은 질이라면 '박하사랑', '오늘은 당근', '싸!커?' 등의 허벌레한 제목보다는 '밀애', '샘', '고백' 등의 얌전한 제목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4. 안면몰수(顔面沒收) - 점원에겐 눈길을 주지 말라 카운터에 있는 점원에게 조용히 전화번호를 불러주고(요즘은 회원카드를 많이 쓴다) 눈길은 카운터 뒤의 비됴나 엄한 곳으로 돌린다. 당사자와의 친분관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점원에게 자신의 속내를 보인다는 건 여간 부담이 아니다. 때로는 주인 아저씨와 잘 아는 손님은 묘한 눈웃음을 나누기도 하지만 불손한 의도라는 사회적 편견에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있을 능력자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사려된다. 좌우간 필자가 애용하는 비됴점은 점원이 아리따운 여자분이라 매번 민망함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밖에 각자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남자 점원이 있을 때만 거사를 실행한다거나 신규프로를 항상 끼어서 대여함으로써 심리적 부담감을 상쇄해 보려는 사람도 있다 . 영화 [비디오를 보는 남자] 그러한 소리없는 전쟁을 치루고 나서 비됴점을 나설 때면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앞으로 있을 거사를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자고로 이러한 가벼운 일탈-이라고 할 수 있을까-에는 신경을 곧추세우는 긴장감이 재미의 한 요소라고 할 수도 있겠다. 더러는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듯 싶다. 그게 싫어 피하고자 한다면 이너넷이라는 불손한 의도의 보고가 있다. 하지만 버벅거리는 화면에 짜증나고 책상 앞에서는 서지도 않는다는 우리의 에로비됴 소비자들은 '정부는, 빨간 코너에 욕실 커튼이라도 쳐달라'고 외쳐야 할까. 그런다 한들 폐쇄된 공간은 그 폐쇄성이 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사실이다. 더구나 여성 소비자에 대한 배려라는 문제로 이야기를 넓힌다면 할 말 없어진다. 어차피 욕구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 욕구를 통해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매번 이러한 소비에 적법한 수요와 공급을 넘어서는 심리적 문제가 작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 낭비다. 자신의 소비에 좀 더 떳떳해 지라고 하는 게 능사일까. 소비행위의 '당당'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의 '당연'이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모두들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꼴린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저항과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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