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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성은 이제 그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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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재창당을 맞이한 이즈음, 강령을 새삼 꺼내보며 성해방의 사명감으로 명랑전선에 복무해 왔던 지난 시절을 회고해본다. 화상특위를 교본 삼아 '음란한 마음'을 세우고, 접선특위를 발판으로 '체위의 융성'에 이바지해온지 어언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왜곡된 성문화를 더욱 왜곡함으로서' '명랑사회 건설'에 이바지할 이데에로기 창출에는 소홀하지 않았는가 일견 반성해본다.

'도덕재무장' 세력의 게시판에서의 이념적 오염 및 불온한 도발에 산발적인 각개 전투를 외로이 수행했던 전위 당원들만이 깃발 없는 참호 속에서 암약할 뿐이지 않았는가. 당 강령에 뿌리박은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여, 수구적 도덕재무장 세력과의 사상투쟁을 하는 데 있어 필살의 무기를 전위당원들에게 제공하는데 본 코너의 의의가 있다 할 것이다.

어느 선수가 말했던가. '남자는 기회가 오면 섹하지만, 여자는 이유가 있어야 명랑에 복무한다.' 아울러 본 코너가 남자의 '기회'와 여자의 '이유'가 행복한 조우를 하는데 징검다리로 활용되기를 기대해마지 않겠다.

우리 남로당은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사상과 이념의 독단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북로당과 결정적 차이가 있다. 열혈 당원들의 치열한 사상투쟁을 환영하며 그것이야말로 명랑사회 건설에 이바지할 이념을 더욱 풍부하게 해줄 것으로 믿는 바이다.

 

아우성은 이제 그만

 

 

구성애는 그저 여러 성교육자 중의 한명이 아니다. 그녀는 대한민국 주류성담론의 공인인증서이며, 성모랄의 스피커이다. 따라서 수구보수적 성이념 뼈대 위에 위선의 화장빨로 가득찬 한국 사회에서 명랑 혁명의 임무를 지닌 우리 남로당으로서는 그녀와의 접선이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구성애가 등장하기 전, 한국의 성교육 현실을 보자.

한편에서 음지의 성교육이 있었다. 청계천 세운상가 뒷골목에서 ‘동물의 왕국’ 등의 기만적인 위장술로 포장된 포르노 비디오가 주교재였던... . 다른 한편에선 출생의 기원을 다리 밑에서 찾는 양지의 성교육이 있었다. 결국 이 둘이 짬뽕되어 도저히 매치가 불가능한 자아분열적 양상을 보여 왔던 것이 한국의 성교육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 10년전 '자위 네 멋대로 쳐라!'는 매우 도발적인 발언을 공중파 방송에서 과감히 표출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구성애 여사이시다. 그녀의 거침없는 입담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구성애 신드롬'이라 불리울만큼 사회적 파장력이 대단했다. 이후 TV, 라디오, 언론매체 등은 물론 학교와 기업체 관공서 등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여 연간 4백회를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세운 아우성닷컴은 국가 대표급 성교육 기관으로 확고히 자리 잡아 모바일 서비스까지 하는 기업으로 탄생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유교적 근엄주의와 뒷골목 포르노의 엇박자 세례 속에 성교육의 황무지에 방치되었던 청소년의 현실을 두고 본다면, 구성애가 터놓은 성 담론의 물줄기는 의미가 있다. 특히 성폭행과 낙태 등의 문제를 생생하게 일깨워줌으로써 범죄 예방과 여성보호를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그녀의 노력은 마땅히 평가받을만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의 성교육가로 평가받으며 스타덤에 오른 구성애의 성교육 내용을 살펴보면, 유교적 보수사상과 기독교적 금욕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 하기야 거기서 벗어나 있다면, 마광수와 장정일을 감옥에 집어처넣는 야만적 근엄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공중파 방송이나 공공기관으로부터 그렇게 각광을 받아가며 승승장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섹스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구성애 개인으로서 그런 가치관을 갖는다는 것을 문제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가뜩이나 위선의 추악한 가면을 쓰고 개인의 사생활에 공권력을 무자비하게 투입하는 성 억압적 사회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간단히 볼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 영향력으로 볼 때, 아우성의 성교육은 우리 사회의 성 억압을 온존, 강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놓여있다.


1. 온전한 성

구성애에게 있어 성은 '사랑 + 쾌락 + 생명'이라는 3대 요소를 다 갖추었을 때에서야 비로서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그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결국 '온전한 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 임신을 가져오는 성은 '심오하고 거룩한' 생명을 기본적인 개념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은 신성한 것이다. 생명보다 쾌락을 생각하니까 성은 음란해지고 부끄러워진다는 것이다.

이 단순명쾌보수통념적 주장을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납득하기 힘든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 논리에 따르게 된다면 피임중의 섹스나 불임 부부의 섹스는 불건전할 수 밖에 없고, 동성애는 불구의 성일 수 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구성애 자신은 자궁이 없기 때문에 '진짜 여성'이 아니라고 말하여 젊은 여성들에게 질타를 당했고, 동성애는 비정상적이라고 하여 동성애 단체로부터 항의서한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피임 전도사 구성애씨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 온전한 성이란 생명을 죽이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생명을 책임지면서 얻어지는 것으로 생명, 사랑, 쾌락의 조화를 통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적인 피임법이란 생명을 책임지고 더 큰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피임을 하는 성은 낙태 등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를 막을 수 있으니까 생명을 책임지는 섹스라고 한다. 이게 논리적으로 성립할까. 생명을 안 만드는 게 생명을 책임지는 길이다? 이 논리를 그 3대 요소(생명,사랑,쾌락) 중 다른 요소에 똑같이 적용하면 이런 궤변도 가능하다. '쾌락이 공허로 끝날 수 있으니까 쾌락을 제거한 섹스가 쾌락을 책임지는 길이다.'

사실, 피임은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 등의 불행한 일을 예방하는 '현명한 방법'으로 적극 권장할 일이다. 그리고 피임이 전제된 섹스는 결국엔 쾌락을 위한 섹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피임 자체를 두고 '생명을 책임'씩이나 지우며 과잉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코미디 논법을 왜 놓지 않는 걸까?

구성애가 하고 싶은 말은 다른 게 아니다. 혼전 순결을 지키고 일부일처제의 결혼생활 속의 섹스만이 가장 올바른 성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전 성관계에 대한 그의 얘기이다.


 
'나는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가졌었다. 결혼을 약속하고 날짜도 잡은 후이긴 하지만 결혼 전인 것이다. 여관을 몇 번 들락거렸는데 그 때의 기억이 유쾌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감정과 짜릿한 느낌의 감각 면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이성적인 판단에 있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중략)...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결혼 전에는 성관계를 안 하는 것이 좋다' 는 것이었다...(중략)... 감정과 감각에 이상이 없어도 이성적인 판단에 떳떳하지 못하면 상쾌한 즐거움은 못 된다. 이성적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어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렇듯 혼전 성관계는 이성적으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성관계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한다. 결혼을 앞둔 후배가 남편될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혼 첫날밤에 첫 경험을 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굳어 있어, 완강하게 거절하였다는 '미담’을 전해주면서, 그 순결을 지켜낸 후배의 결혼식이 그렇게 성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는 것이다.

구성애가 NL 출신이라 교시에 그렇게 맹목적인 습관을 가졌는지 몰라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 혼전 섹스에 대한 죄책감이 구성애 자신의 가치관 때문에 생긴 것을, 그 가치관이 마치 이성적 판단의 전부인양 내세우다니 이게 뭐하는 시츄에이션? 혼전 섹스에 떳떳한 개방적인 사람들이 갖는 가치관은 그럼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란 말인가?

논거가 그렇게 황당하니 그걸 뒷받침하는 사례도 생뚱맞다. 혼전 순결을 가진 '후배'의 결혼식이 그렇게 성스럽게 보였다는 영적인 투시력이 그것이다. 여기에 보너스로 가부장제의 기초로 두고 있는 예의 '책임론'을 하나 더 선물해 준다.

혼전 성관계를 문의하는 이들에게 그는 진정한 성은 '책임을 지는 성'이라고 하면서, 혼전 성관계의 부작용(임신, 낙태 등)을 잔뜩 늘어놓고 이래도 하겠냐는 식이다. 성인이 상호 욕망에서 하는 것을 누가 누구보고 책임지라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겠거니와, 부부 관계에서도 낙태 등의 부작용은 더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쏙 빼먹는다. 이러니 젊은 페미니스트에게 외면 당하는 것이다.

 
2. 음란물과 가짜 쾌락

그녀는 모든 악의 근원을 음란물에서 찾는 듯하다. 포르노는 여성의 몸을 성적 노리개로만 본다. 또 불건전한 성충동을 일으킨다. 중독될 염려가 무척 크다. 그래서 성폭행 등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특히 청소년들이 보면 그대로 모방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막아야한다. 대략 이런 흔해빠진 통념이다.


 
성적 대상화
 


구성애는 우연히 호텔방에서 포르노를 본 후 3일 동안 남자의 성기 모습이 보는 남자들마다 오버랩 되어서 놀랐다고 한다. 바빠서 그랬지 만약에 한가한 여자였다면 눈이 이상하게 풀린 서양여자처럼 되었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또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외국 에로비디오를 잠자리에서 보았고, 흥분되어 섹스를 나눈 경험을 얘기한다. 그 당시 잠자리는 뜨거웠으나, 관계 후의 기분은 왠지 자신이 저속해진듯한 느낌이어서 기분이 불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 '가짜 쾌락'이다.

반면 아들이 반에서 1등 한 것에 기분이 좋아 남편한테 알렸더니, 남편이 성적보다 원만한 성격을 더 바라더라는 '기특한' 얘기를 듣고는 남편이 새삼 존경스러워졌고 그런 부부간의 대화 끝에 잠자리를 가졌는데 관계 후에도 저속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라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일치되었으니 이번엔 '진짜 쾌락'.

이런 무지막지한 이분법도 경악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걸 도출해내는 과정도 막가파식이다. 진짜와 가짜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위대하신 구성애 지도자의 경험과 느낌일 뿐이다. 이로써 포르노나 에로물을 보고 섹스를 나누면서도 저속했다는 느낌이 없었던 나와 아내는 가짜 쾌락에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중생이 되어버렸다.

내가 초딩 6학년 때 처음 포르노 만화책을 본 후, TV에서 모든 여자들이 벌거벗을까봐 조마조마했던 경험을 구성애는 서른이 넘어 경험했나보다. 포르노 만화책을 본 며칠이 지난 후에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며 그 어렸던 나도 일상에 착실하게 복귀했다. 그로부터 수년 동안 '빨간책'을 줄곧 탐독하고 자위에 몰두한 일도 있었건만, 순정에 빠져 끙끙 앓던 사춘기적 열병을 앓았을망정 모든 여자를 섹스에 환장한 여자로 여겨 눈이 뒤집어지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이건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보통 남자들의 평범한 성장과정의 한 단면일 뿐이다.

 청소년 시절 포르노를 경험한 남자들의 비율은 90%에 육박한다. 인터넷 발달에 따른 '디지털 익사이팅'의 '해악'으로 특징지워질 일도 아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비슷하다. 왜냐하면 교실에 포르노물이 도착하면 바이러스처럼 순식간에 교실 한바퀴를 돌기 때문이다. 때로는 수상한 액체의 흔적이 묻어있는 채로 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포르노물로 친다면 까피레프트의 공유정신의 원조라고 불릴 만하다.

이런 흔해빠진 포르노물이 모든 성범죄의 온상이며,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정신착란 증세의 마약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이미 남자의 90%의 이상이 포르노를 접한 한국 사회는 옛날에 거덜 나 있어야 했다.

물론 포르노가 섹스에 미친 성적 대상으로만 여성을 묘사하면서 매우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것 일뿐이지 여자를 모멸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다. 뻔한 스토리의 백마탄 왕자의 황당한 로맨스류의 영화와 소설이 여자의 판타지를 만족시키듯이 말이다. 여자를 '성적 대상의 도구'로만 묘사하여 모욕감을 준다는 질타도 언뜻 매우 인간주의적 비판인 것 같지만 현실을 두고 보면 낯간지러운 세설에 불과하다. 인간의 목적론적 가치성을 강조하고 싶은 모양인데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와 대립되는 개념인가?

 

상대방을 전인격적으로만 대하고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령 먼 곳에 근무하여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아버지가 집에 올 때마다 아들에게 풍족한 용돈을 준다고 치자. 그럼 아들은 용돈이 궁할 때마다 아버지를 매우 그리워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은 아버지를 용돈 주는 기계로만 생각하는 후레자식이라 단정지울 수 있을까? 모든 비즈니스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고객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고자하는 이유 때문이다. 거래 상대방과 대화하고 술 마시는 것도 유리한 계약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일련의 사회적 관계가 인간을 수단화한다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애지중지 키우는 애완견과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나는 섹스파트너가 있는 집에서 불이 났다고 치자. 둘 다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섹스파트너를 외면하고 애완견을 먼저 구할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이렇듯 비즈니스나,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문제에 있어서나 근본적으로 그 바탕에는 상식적으로 목적론적인 인간관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지, 인간의 존엄과 그 문제를 강제로 분리하여 비난을 퍼붓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는 도저히 적용 불가능한 상황을 맞게 되어버린다. 구성애는 청소년들이 자위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 그런데 자위를 하게 된다면 대다수가 머릿속으로는 매우 '음탕한' 생각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성적 대상자'로서 이성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결국 그녀는 자위하는 손은 용서하되, 머리는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기막힌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본인이 말하는 '진짜 쾌락'은 건전한 대화 끝에 나누었던 섹스였으므로, 수학 문제를 고민하며 딸딸이 치는 것을 내심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 이 놀라운 성적 취향이여! 페티시 목록에 새로운 것을 추가시켜야 될 것이다. 이름하여 구성애의 '도덕 페티시'.
남로당
대략 2001년 무렵 딴지일보에서 본의 아니게(?) 잉태.출산된 남녀불꽃로동당
http://burur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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