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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 미술관] 창녀와 난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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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파리의 환락가를 누비던 난쟁이가 있었다. 난쟁이의 두툼한 입술에는 술이 마르지 않았고, 잘 차려입은 수트의 주머니에는 낙서같은 그림이 넘쳐났다. 난쟁이의 이름은 앙리 마리 레이몽 툴루즈 로트랙(Lautrec 1864~1901). 길고 긴 이름만 들어도 가문의 위용이 느껴진다. 그의 부모 아델 드 틀루즈 로트랙과 알퐁소 드 툴르즈 로트랙은 보크스 성을 지배하는 명문가의 사촌이었다. 근친혼의 결과로 태어난 아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고 두 차례의 사고로 부러진 다리는 회복되지 않았다. 로트랙은 15세 때 이후로 성장하지 않았고 152cm의 단신으로 살았다. 로트랙이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 (합성사진)
난쟁이가 되어버린 귀족집안의 자제는 성을 떠나 파리의 몽마르트에 자리잡았다. 그는 카바레 물랑루즈(Moulin-rouge)에서 술을 마시거나 그림을 그렸고, 대개는 술을 마시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난쟁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호사가들의 관심은 곧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으며, 당대 유명화가의 화실에서 교육을 받은 적도 있었다.) 환락가의 단면을 포착한 그의 작품은 널리 인기를 얻었다. 그는 대중적인 인기에 부합하여 석판화 기법을 발전시켜서 대량으로 컬러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제작한 포스터를 구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그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알콜중독으로 사망하기까지 몽마르트의 인기작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쾌락의 여왕] 1892년 석판화로 제작.
로트랙은 다수의 포스터를 남겼다. 술집 홍보용 포스터는 그의 주 수입원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고 주위에는 친구가 끊이지 않았다. 그와 교우했던 화가들 중에는 반 고흐와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반 고흐가 얼마나 미친 사람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창녀에게 자기 귀를 잘라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통해 익히 알고있을 것이다. 이 괴팍한 화가도 로트랙과는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 반 고흐는 아를르로 떠나기 전 몽마르트에서 지냈는데 나름대로 부유했던 로트랙은 가난한 고흐의 생활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모든 부자가 가난한 친구에게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1887 로트랙은 전락을 경험했던 사람이었다. 유년기, 귀족집안에 태어나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서 사냥이나 하며 소일하다 비슷한 가문의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또 다른 여자들도 만나서 물려받은 돈을 쓰고 놀다 가는 유유자적한 인생이 펼쳐질 듯 했으나, 그는 난쟁이가 되어버렸고 절망 속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서 소외된 화가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창녀촌에서 많은 밤을 보냈다. 불구의 몸이었기 때문일까, 창녀들은 로트랙을 손님이라기 보다는 친구로서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로트랙을 받아준 여자들은 그녀들 뿐이었다. 정상적인 연애를 하기에는 너무나 왜소한 몸을 가진 난쟁이는 술에 취해 그녀들과 함께 웃고 떠들었으며 그녀들을 위로했고 또 위로 받았다. 로트랙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내 키에 맞는 여자들을 발견했다.' [물랑루즈에서] 1892
[라 모르(Rat Mort)] 1899
로트랙은 물랑루즈의 여자들을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여자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들은 적나라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과 과잉된 감정을 노출한 채 이미지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대체 왜 여자들을 이렇게 추하게 그리느냐?'는 질문에 로트랙은 이렇게 답했다. '그녀들이 추하기 때문이다' 로트랙은 섹스를 매개로 남자의 주머니에서 돈을 긁어가는 그녀들을 조롱하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로트랙은 창녀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런 사랑을 미화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창녀들의 일상이 무심하게 드러난다. [스타킹을 올리는 여자] 1894
[성병검사] 1894
스타킹을 신는 모습,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 그녀들의 일상이 무심하게 담겨있는 로트랙의 그림을 보면, 보들레르의 모더니티 개념이 떠오른다. 보들레르가 말한 현대적 미의 요소는 '개별적이고 상황적이며, 당대의 풍습을 묘사하는 것'이며 모더니티는 '일시적이며 순간적이고 우연한 것'으로부터 '영원한 어떤 것'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특히 미술에서는 일시성에서 영원성을 찾아내기 위해서 동시대의 풍속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로트랙은 진실로 파리의 뒷골목을 누비던 소요자(flaneur, 산책자)였으며, 동시대의 단면을 직설적으로 표현함으로 시대를 초월한 영속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 로트랙의 작품에 등장하는 창녀들은 오늘날 (유사)성매매 업소 홍보용 이미지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오빠 지금 쌀거같아' 따위의 문구 아래 붉은 입술을 벌리고 기묘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가씨의 이미지를 보면서 그녀의 일상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를테면 라면을 먹는데 흰옷에 국물이 튀어서 짜증이 나는, 손님을 기다리다 지루해져 고스톱을 쳤는데 돈을 잃어서 소리소리 지르며 화를 내는,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자기들보다 많은 돈을 벌어가는 '에이스 급' 아가씨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는, 정기검진을 받으러 보건소에 가면서 혹시 무슨 병이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내심 불안해 하는, 그런 그녀들의 일상 말이다. 고백컨대 그 동안 나는 성산업에 대해 신문의 헤드라인처럼 선정적인 문구만을 알고 있었다. '미아리 집창촌 화재 5명 사망', '군산 윤락가 화재 참사', '북창동 변태영업 실태'와 같은 제목을 달고있는 기사에 등장하는 창녀들은,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자력갱생의 여지가 없는 방종한 여자들이면서 동시에 혹독하게 착취당하다 불운하게 죽어버리는 여자들이었다. 어쨌든 그런 모든 상황에서 그녀들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하고싶지 않은 상대와 섹스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세상에 누가 제 존엄을 팔아 살겠는가?' 라는 말(김규항, ['상업적 매매춘'에 관한 유일한 진실] 中)에 나는 순진하게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대체로 진실이란 것들이 그러하듯 이 말에도 결정적인 함정이 있다. 첫째로 누군가는 '하고싶지 않은 상대와 섹스하는 것'이 '존엄을 파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인간적 존엄성은 태생적인 것이지 외부의 평가기준에 의해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점은 현실적으로 창녀들이 매춘 외의 방법으로는 결코 비슷한 돈을 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나는 '성매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 하의 노동착취라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따위의 좌파-몽상가들의 주장에 박수를 보내왔다. [La Clownesse assise] 1896
이러니 저러니 지껄였지만 고백컨대 나는 현실적으로 창녀들의 생활을 개선하거나 인권을 보장하는 방안 보다는 성매매 문제에 대한 그럴듯한 관점을 세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관점을 확립하기 위해 수집했던 근거는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스스로 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좌파-몽상가의 거대담론이든 여성주의-운동가의 구체적 실천과제든, 성매매에 관해서 내가 알았던 모든 이야기들은 어쩌면 허구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창녀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한번도 없다. 툴르즈 로트랙이 그랬던 것 처럼, 그녀들과 눈을 마주치고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접근성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인 권력 차이의 문제이다. 그녀들이 용기내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어도 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기왕 삼천포로 빠진 김에 창녀와 난쟁이의 사랑이야기나 해볼까 한다. 아래 그림은 자신의 여동생과 프로마주의 팔짱을 끼고 물랑루즈로 들어오는 댄서 라 굴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녀는 본 칼럼의 첫번째 석판화에 표현된 댄서와 동일인물이다. 첫번째 이미지 아래에는 정보를 넣지 않았는데 제목은 [물랑루즈-라 굴뤼], 1892년 작품이다.) [La Goulue Arriving at the Moulin Rouge with Two Women] 1892
알사스 출신의 시골뜨기 라 굴뤼는 파리로 들어와 캉캉춤을 변형시킨 독특한 춤으로 인기를 끌기까지 고생스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로트랙은 그녀의 전성기부터 은퇴 이후까지 그녀를 지켜보았고 그녀를 모델로 수십점의 작품과 습작을 제작했다. 말년의 라 굴뤼는 화려한 물랑루즈에서 밀려나 지역의 서커스에나 출연하게 되었다. 로트랙은 오랜 시간 알았던 늙은 여인을 위해 두 점의 장식화를 그려주었다. 언제나 친구나 창녀들과 함께 있었으며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했던 로트랙에게 음주는 외로움을 달래는 약이자 생활의 일부였다. 진과 압생트, 브랜디와 위스키, 이 모든 것을 혼합한 폭탄주를 마셔대던 로트랙은 서른다섯살의 나이에 알콜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으며 퇴원 이후에도 주위 사람들 몰래 술을 마셨다. 결국 그는 서른일곱에 죽었다. 라 굴뤼는 로트랙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어쨌든 창녀촌에서 낭만을 찾는 시대는 끝났다. 공적인 보도를 보면 성매매특별법 제정 이후 정부의 강력한 단속의지로 성매매가 근절되어가고 있으며 성매매업소가 밀집되어있던 지역은 쇠퇴일로를 향하는 등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 같다. 하지만 최근 이에 반대하는 투쟁을 보고 있자니 착찹한 마음이 든다. 사회적 약자를 사회의 저 구석,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몰아가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었던 것일까? 저자 : 남로당 예술진흥위원장 Maril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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